아버지의 굴레와 천륜(天倫) (76...

내가 어머니를 더욱 그리워했던 것은 기실 아버지의 한 치 빈틈없는 엄격함과 메마른 정에 대한 갈구였을 것이다. 나는 해방 후 가출할 때 아버지하고 영원히 만나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었다.

보령의 어머니를 찾아가 만난 후 관훈동에 가정교사로 가 있다가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가 졸업하게 되었을 때다. 학교에서 가족친지들에게 졸업식에 참석하라는 초청장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초청장 주소를 어디로 쓸까 하다가 관훈동의 가정교사 집으로 했다. 그렇게 해서 가정교사 집 아주머니가 그 초청장을 받았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아버지를 찾아가 “댁의 아드님이 사관학교를 졸업한다. 몇 월 몇 시에 참석하라는 초청장이 왔는데 내가 갈 성질이 아니고 아버지가 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초청장을 전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사관학교 졸업식 날 아버지가 오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날 아버지와 나는 못 만났다. 사람들이 많은데다 내가 가장 자리에 서 있었는데 가정교사 아주머니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 데리고 나왔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나를 중국집으로 데리고 와 요리를 사주었다. 아버지가 왔었다는 얘기는 나중에 가정교사 아주머니가 얘기해주어서 알게 되었다.

가정교사 집 아주머니가 무척 나를 아꼈다. 아주머니는 “모범학생을 왜 집을 나오게 했느냐, 불가사의하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나중에 계모에다 아버지가 엄한 가정 사정을 알게 되고서야 이해를 했다.

가출 후 아버지와는 일절 연락을 끊었지만 할아버지와는 소식도 주고받고 왕래도 했다. 임관해서 소위로 있을 때 할아버지께서 삼각지의 부대로 다녀가셨던 기억도 난다. 당시 아버지와 할아버지 사이도 썩 좋지 않았다.

6·25 때 아버지는 서울 충무로 집에 계셨다. 인민군의 서울 입성 후 집이 폭격을 맞으며 아버지는 수원 본가로 왔다. 본가도 폭격을 맞아 일부만 남은 상태였는데 아버지는 쭉 거기서 기거하셨다.

▲ 가족들과 함께 / 오른쪽부터 아버지, 할아버지, 필자

내가 아버지를 만난 것은 휴전 한참 후인 공병재생창장 시절인 부산 청학동에 살 때다. 그때 계모의 첫째 아들인 열한 살 터울의 이복동생 종락이가 또 가출을 해서 부산의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종락이가 어머니한테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집에서는 부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종락 동생은 동네에 있는 쌀집 딸과 사귀고 있었다. 처녀도 괜찮고 해서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결국 장가를 가기로 결정이 되어 아버지가 오셨다. 나는 그때 비로소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실로 15년여 만이었다.

그때의 만남부터 아버지의 뒤치다꺼리가 시작되었다. 재생창장 시절 나는 처음에는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며 집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모았다. 아내가 계도 들고 근검절약해서 그때 돈으로 20만원을 모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도의원 선거에 나가겠다며 20만원을 선거자금으로 써야겠다며 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안 된다고 했는데 아내가 “아버지가 쓰신다는 데 어떻게 거절하느냐.”며 돈을 갖다 드렸다. 아버지도 도의원에 당선되고 나도 그 후 AID자금으로 집은 마련했지만 솔직히 아버지를 돕는 게 그리 흔쾌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 경기도의원을 지내던 아버지가 중도에서 하차하고 5대 총선에서 수원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반대했다. 도의원 출마 때 작은아버지들도 다소 간의 보탬을 주었고 유권자들의 지지로 당선되었으면 임기를 마치는 게 도리라며 반대했는데 끝내 아버지는 도의원 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민주당으로부터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러면 포기할 만도 하련만 아버지는 민주당을 탈당해서 전진한[錢鎭漢, 1901. - 1972.] 씨가 주도하는 한국사회당에 입당해 공천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출마했지만 결국은 낙선했다. 그 여파로 인해 이때 가산을 거의 탕진했다. 전쟁 때 서울 집은 전소되고 수원 집도 소실된 판에 낙선까지 했으니 폭삭 망하다시피 한 것이다.

그때부터 내가 매달 생활비를 대주어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부족하다며 걸핏하면 찾아오셔서 생활비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폐일언하고 장자(長子)가 부모를 돌보지 않으니 고발한다고까지 하셨다. 그런 때 무엇보다 아내가 다 삭이고 아버지를 많이 도와줬다. 나보다도 아내가 현명하게 대처를 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