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IOC 총회에서 차점으로 낙선하고 7월 말에 귀국, 지친 몸을 달래고 있는데 8월 들어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김대중 대통령이 만나자는 것이었다. 동양인 최초로 전대미문의 IOC 위원장에 도전했던 나에게 아무 지원도 없었던 까닭에 혹시 위로나 격려를 해주기 위해 만나자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궁금증을 안고 청와대로 향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너무나 뜻밖의 말을 꺼냈다.
“김 회장이 하는 일이 너무 많으니 부산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과 대한체육회장직에서 물러나고 국회의원직에만 전념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부산아시안게임에 북한은 오지 않을 거고 같은 해에 월드컵이 있어 부산아시안게임이 엉망이 될 것이며 체육회장도 너무 오래한 것 아니냐”고 말을 이었다.
나는 부산아시안게임은 5년 동안 준비해서 자리가 잡혔으니 손을 떼어도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바로 다음날 그만두었다.
부산에서는 속내도 모르면서 갑자기 그만두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 나쁜 사람이라고 법석을 떨었지만 내용을 밝힐 수도 없어 욕먹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2005년에 부산이 올림픽 콩그레스를 유치한다고 허남식 시장이 나를 찾아 왔기에 그 얘기를 해주었더니 그런 줄 몰랐었다고 깜짝 놀랐다. 허남식 시장은 내가 부산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 위원장 때 기획단장으로 수고한 사람이다.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벌려 놓은 일을 훌륭하게 마무리 짓지 못하는 무책임한 사람 꼴로 전락하게 되었다.
대한체육회도 일으켜 놓은 만큼 일으켜 놓아 어느 정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었으니 그만둘 결심을 하고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그만두겠습니다.”하고 즉답을 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몇 개월 후에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이 있는데 지금 바로 그만두면 지금까지 준비한 것에 혼선이 오고 무너질 터이니 시기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하고 나왔다.
씁쓸함이 마음 한 편에 몰려왔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넘어진 사람 밟는 꼴이며,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그때 내가 선출된 대한체육회장의 임기는 3년 반 가량이 남아있을 때였다.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솔트레이크동계올림픽까지는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그만둘 각오를 굳혔다.
대통령과 만남이 있은 며칠 후 한광옥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야기 잘 되셨다지요. 그만두는 날짜를 언론에 밝히지시요?” 하기에 미리 날짜를 밝히면 레임덕(Lame Duck)이 되는데 “그만두는 날짜는 내게 맡겨주시죠”라고 답했다.
당시 항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이며 실세인 권노갑 씨가 체육회장으로 온다는 설이 나돌고 있었다. 그래서 한광옥 실장의 전화가 좋게 생각하면 날 위해 하는 것인지, 그만 둘 날짜를 재촉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까지는 내 책임이라는 생각에 동계올림픽 후 거취를 표명하기로 하고 동계올림픽 준비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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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릉선수촌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IOC기념탑 증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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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쇼트트랙 경기에서 강력한 금메달 후보인 김동성 선수가 1위로 들어왔으나 진로방해로 판명돼 금메달이 미국 선수 안톤 오노에게 돌아갔다. 이 때 나는 이상을 하기 위해 장명희 빙상위원과 밑에 내려가 있었는데 진로방해 장면이 계속 비디오로 돌려지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야단이 났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금메달을 도둑맞았다는 것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요새 한창 일고 있는 소위 자기 말이 옳고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이 진실이라는 바람몰이가 이 때 이미 시작된 것임을 알겠다. 국제빙상연맹(ISU)을 비롯한 국제체육계에는 아직도 진로방해로 판정이 나 있지만 당시는 매우 심각했다. 반미 움직임이 있을 정도로 국민의 여론이 좋지 않았다. 즉시 박성인 단장에게 국제빙상연맹에 제소하게하고 스포츠 중재위원회에 고발하고 소송을 하라고 지시했다. 소송에 드는 경비 5,000불도 내가 주었다.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인 박성인 단장은 매우 신중한 사람이다. 나처럼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 지시한 기자회견까지 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항소를 한다고 했더니 기자들이 걸고넘어졌다.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는 심판의 판정 시비가 많았는데 그중 피겨스케이트 등의 경기에서의 편파판정 문제로 러시아가 보이콧 운운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기자들이 우리의 강력한 조치에 보이콧도 포함되냐는 질문을 던졌고 박성인 단장은 보이콧도 포함된다고 답해 버렸다.
러시아에 이어 한국의 보이콧 언급은 IOC를 크게 긴장시켰다. 자크 로게가 IOC 위원장에 선출된 후 처음 열린 올림픽이고 특히 미국의 경우, 9.11사건 직후 국위선양을 생각한 대회인데 러시아와 한국이 보이콧을 한다면 실패한 올림픽으로 기록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로게 위원장이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보이콧을 안 하겠다고 성명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이 보이콧을 하면 러시아도 해서 올림픽이 엉망이 된다는 것이었다. 보이콧을 안 한다는 표현이 어색하고 뭐가 좋을지 몰라 IOC에서 성명서를 하나 준비해 달라고 했더니 지금까지의 올림픽 게임(these successful games)처럼 폐회식에 한국 팀이 참가한다는 표현이었다.
한국방송 특히 MBC는 these successful games에서 these만 빼고 successful game에만 큰 동그라미를 쳐서 “무엇이 성공적인 대회냐”며 나를 성토하기에 이르렀다. 진위를 잘 파악하지 못한 국내 네티즌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지는 진풍경도 나왔다. 미국올림픽위원회 컴퓨터가 다운되었고 내 사무실 것도 마찬가지였다. these successful games란 의미는 지금까지 개최되어 온 올림픽이 인류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데 성공적이었으므로 우린 그런 의미에서 보이콧을 하지 않고 폐회식에 참가한다는 의미인데 그저 successful game으로 하면 편파판정으로 얼룩진 이번 대회가 성공대회라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초등 영어 수준인데 사람을 공격하려면 어떤 방법으로도 가능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이미 한국은 88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하고 있는 올림픽운동의 선두에 서있는 나라였다.
한미관계를 보나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추진 중에 있는 입장에서 보이콧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람몰이 여론은 막무가내였다. 진실이나 국가이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 국무성도 한국의 보이콧을 걱정한다는 얘기를 주미 대사관을 통해 들었다. 당시에는 이성적 처리보다는 감성적 처리 요구가 강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면 IOC나 국제경기연맹에 정당한 절차에 의해서 항의하고 소송해서 해결하는 것이 진정한 스포츠인의 자세가 아닌가.
시간이 흐른 지금 돌이켜 보면 물론 동계올림픽 금메달도 엄청난 가치를 가지겠지만 올림피즘을 지키고 스포츠 정신을 함양하는 자세야말로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의 현장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 충분히 이해되고 납득할만한 상황이 어렵게만 흘러가고 있었다. 내 생각으로 내가 그만둔다는 발표를 안 했기 때문에 감정이 나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용성 KOC부위원장이 서울에서 오더니 “청와대와 문화관광부 관계자들이 김 회장에 대해 굉장히 나쁘게 얘기하고 있으니 서울에 한 번 갔다 오는 게 좋을 것이다.”라는 조언까지 할 정도였다. 서울에서는 선수단 귀국 시 나에 대한 규탄 시위가 있을 거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2003년 2월 말 대한체육회 정기 대의원 총회가 플라자호텔에서 열렸다. 대의원 총회는 대한체육회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로서 대한체육회 가맹경기단체장이나 경기단체에서 추천한 인사가 대의원이 된다. 그때 나는 상정된 의사일정을 모두 마치고 회의 말미에 모든 대의원 앞에서 “이제 한국 체육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나의 소임을 다한 것 같으니 사임하겠습니다.”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회의 주재를 임시의장에게 맡기고 회의장을 떠났다.
급작스런 발표에 깜짝 놀란 경기단체장들은 안덕기 대한승마협회장이 대표가 되어 전 경기단체 명의로 사임불가 결의를 두 번이나 채택하고 선수촌도 사퇴불가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태릉선수촌(촌장 장창선)도 결의를 했다. 그러나 임기가 3년 넘게 남아있었음에도 김대중 대통령에게 약속한대로 사임을 강행했다. 대통령에 대한 예의는 지키고 싶어 이유는 말도 하지 않았다. 김정행 부회장을 직무대행으로 지명하고 4개월 후에 수렴청정, 복귀 등 유언비어가 돌아 김정행 부회장에게 선거를 하도록 권했다. 퇴임식도 안 했기 때문에 얼마 후 63빌딩에서 있은 나의 저서 『세계를 향한 도전』출판기념회에 태릉선수촌 입촌 선수 전원을 초청해서 저녁을 함께했다.
체육회장 재임 중 민관식, 이건희 명예회장, 사무총장 배순학, 김광수, 김철주, 김승곤, 윤강로, 백성일, 장창선, 이상균 선수촌장, 정몽구, 김승연, 박갑철, 이상철, 한양순, 홍양자, 윤덕주, 장충식, 김종량, 김성집, 조정순, 김상겸, 여무남, 김남학, 박성인, 박상하, 이덕분, 조경자, 박희백, 장주호, 이혜숙, 이강평, 이학래, 김봉섭, 이영숙, 신민자, 신박재, 유병진 부회장 등 일일이 거명은 다 못하지만 큰 힘이 되어주어 감사하고 있다. 또한, 사무국 경기단체 직원, 감독, 코치 한국스포츠 발전에 힘이 된 여러분에게 감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