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5일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인 방북에 일원이 되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인상은 지금까지 서방측에 알려졌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김 위원장은 명석하고 통솔력도 있어 보였으며 바른 판단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폐쇄적이며 닫혀 있는 마음을 갖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산이었다. 김 위원장은 호쾌하고 유머 감각도 뛰어났으며 열린 사고를 갖고 있었다. 매사에 자신이 넘쳤으며 옳다고 생각한 일은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이었다.
예전에 동서 냉전이 끝나려던 때에 고르바초프(전 소련 대통령)과 만났던 ‘철의 여인’ 영국의 대처 수상이 “당신(고르바초프)이라면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하였다는 일화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면 대화가 통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김 국방위원장 나를 보며 한 첫 마디는 “체육회장이 오셨다는 말씀 들었어요. 무엇을 해드리면 되요?” 였다. 나는 그간 남북 동시입장 제안에 전혀 반응이 없어 속이 타고 있던 참이라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에 남북 공동 입장을 IOC가 제안하고 있는데요”하고 바로 말을 꺼냈다. 그랬더니 그것 말고 “남북한 합해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고 되묻기에 나는 축구나 태권도도 아닌 것 같고 해서 탁구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탁구는 ’91년 일본 치바에서 열린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서 남북한이 단일팀이 되어서 여자가 우승한 적이 있었다. 나도 그때 일본 나가노에서 있었던 남북팀 합동 훈련장에 찾아가서 격려를 해주었다.
남북 정상회담과 더불어 분야별 실무회의가 열린 자리에서 나는 장 웅 IOC 위원 겸 북한체육지도자위원회 부위원장과 구체적인 남북 동시 입장에 관해서 폭넓은 의견을 나누었다. 장 웅 위원과 나는 사상 처음인 남북한 올림픽 동시 입장은 남북 평화의 상징이라는 데 입장을 같이 했으며 IOC가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어 분명히 성사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6월 15일 발표된 남북 합동 성명서에서도 합의 내용 중 하나로 스포츠 분야의 교류, 협력이 명시되어 있고 김정일 위원장도 “남북 체육계가 서로 협력한다면 보다 좋은 결과를 얻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기에 남북 동시 입장은 눈앞에 와 있는 듯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북쪽에서는 회신도 없었고 한때 서울에서는 그만두라는 말까지 있었다. 시드니 도착 후, IOC 중재로 3일간 마라톤회의 끝에 겨우 성사되었다.
남북회담에서 돌아오니 사마란치 IOC위원장에게 전화가 왔다. 외신에 남북정상회담 사진이 나왔는데 나도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 후 미 워싱턴에서 국회 외교통상위원회가 참석하는 세미나가 있어 한승수 외무장관과 유재권 의원 등과 같이 가게 됐다. 평양에 직접 다녀왔다는 이유로 상원외교위원회와 하원위원회에서 내가 직접 설명을 하게 됐다.
나는 과거 수 십 년 동안 한국 스포츠를 대표해서 북한 체육관계자와 교류했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기회가 올 거라 생각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을 수행하고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에 참가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스포츠는 세계의 언어다. 정치, 사상, 문화적 차이 등 어떠한 장애물도 뛰어넘는다. 또 IOC의 바하 위원장 말대로 오직 올림픽에서만은 누구나 평등하다. 남과 북이 분단된 지 55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 문화와 체제의 차이가 커짐에 따라, 성급하게 하나로 통일되는 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스포츠는 서로의 마음을 일치시키고 하나가 되는 데 있어서 가장 이상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