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일 위원장과 장 웅 IOC 위원에게 남북 동시 입장에 대해서 제안했지만 서울로 돌아온 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다. 내심 걱정이 되던 중 7월 말 스위스 로잔에 있는 IOC 본부로 북한 측의 답장이 도착했다.
IOC는 처음에 “남북 동시 입장 때 IOC 깃발과 남북 양국의 국기를 들어 모두 3개의 깃발을 들고 행진한다”고 제안했었다. 그리고 “선수단복은 통일하되 경기는 별도로 하고 시상대에서의 국가도 별도로 한다”고 했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서 북한은 “쌍방의 국기를 동시에 들고 간다는 것은 어색하다. 그것은 분단을 고정한다고 볼 수 있다. 남북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예전에 일본 치바에서 세계 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을 때 사용한 한반도기를 들고 가자”고 IOC 제안보다 한발 앞선 안을 내놓았다. IOC의 답변은 “북한 측의 의사를 존중하며 한반도기를 들고 가도 상관없다”는 내용이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 같던 남북 동시 입장에 대한 남북 교류는 그러나 또다시 정체국면을 맞이했다. 이 상태로 간다면 준비할 시간도 부족하고 잘못하다가는 아무런 진전 없이 흐지부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시드니 올림픽에 남북 최정상을 초대하는 것이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지만 한번 시도해 보자”고 동의하면서 IOC 위원장 명의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결국 김정일 위원장은 “불가능”하다는 뜻을 보내 왔지만 IOC로 답변을 보낸 것 자체가 남북 체육교류에 있어서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의미로 생각했다.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 직전 북한 측의 장웅 위원을 비롯한 3명의 임원이 시드니에 도착했다. 북한 측의 체육 관련 최고위층인 박명철 북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시드니에 도착한 날부터 대화는 급진전되었다.
장웅 IOC 위원은 7일 시드니 공항에서 기자단에게 “아직 협의를 하는데 시간이 있다. 남북 단일팀을 구성한 ’91년 치바의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의 경우를 보아도 복잡했던 문제를 하루 만에 해결한 적이 있다. 남북 동시 입장은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다. IOC를 포함한 3자간의 문제이며 현재 교섭이 진행 중이다. 특별히 장애가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IOC의 생각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정신을 존중한다면 입장을 함께 하고 경기는 별도로 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함으로써 남북 동시 입장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사마란치 위원장과 나, 그리고 장웅 위원은 긴급 회합을 가졌다. 장웅 위원은 “남과 북 어느 쪽이 메달을 획득할 경우 양국의 국기 대신 한반도 기를 게양하고 국가 대신 아리랑을 연주하자”고 제안했는데 사마란치 위원장은 “이 제안은 이해는 가지만 IOC 헌장에 비추어 전례가 없으며 이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3개월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부정적인 답변을 하자 북한 측은 이 제안을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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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KOC위원장 주최 리셉션에서 / 김운용 위원장, 이건희 회장, 장웅 IOC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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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에는 나와 사마란치 위원장이 “단일팀 구성에 문제가 있다면 일단 남북 동시 입장이라도 실현하는 게 어떤가”라고 북측에 제안했다. 이 제안에 북한 측은 “원칙적으로는 좋으나 양국이 50명씩 선발해서 입장하자”고 응했다. 나는 “한국 대표팀은 400명 가까운 숫자인데 50명은 너무 적으니 숫자를 늘리자”고 말했다.
남북 선수단은 선수단 규모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기에 같은 수로 선수단 입장을 할 경우 한국 측 선수단에서 많은 인원이 제외될 것이며 그러면 입장에 참여하지 못한 임원 선수의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이 예상됐다. 이런 문제와 함께 남북 선수단이 같은 조건으로 입장하기 위해서 단복을 같은 것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도 이견이 있어 결론이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그러자 사마란치 위원장이 양국이 입장할 선수단 수를 100명씩으로 늘릴 것을 제안하자 북측은 다음날 평양에 연락을 취한 후 “명칭은 코리아, 국기는 한반도기, 경기는 별도로 한다”는 주장만을 반복할 뿐 입장 선수단 수에 관해서는 자기네 측의 원칙만을 고집했다. 나는 우리 선수단이 400명이 넘는다고는 했지만 실은 우리도 선발진이 200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다음날 경기에 나갈 인원을 빼면 모자랄 지경이었다.
최대한 많은 수를 입장할 수 있도록 대화를 끌어가고 있었는데 사마란치 위원장도 북측의 완강한 입장에 이제 남북 동시 입장은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회담은 끝나지 않고서는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최종 회담 날, 북한 측은 “김 회장의 그간의 노력과 입장을 충분히 배려해서 저희가 양보하기로 했습니다. 남북 쌍방이 90명씩으로 입장 선수단을 하기로 합시다”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북측도 임원 20명을 급조해 증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남북이 90명씩 모두 180명으로 하기로 되었는데 최종 입장 행진은 남한이 120명, 북한이 60명이 된 것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속에 진행된 남북 동시 입장은 올림픽 역사상 최초이며 정말 훌륭하게 진행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북 동시 입장의 인원수가 확정이 되었지만 동시 입장에 따른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단 남북이 합의한 단복 조달이 시급한 문제였다. 개회식까지는 이틀의 여유밖에 없는 데다 한국은 최대 명절인 추석까지 겹쳐 있어서 대부분의 상점이 휴무 상태였다. 긴급히 서울로 연락해서 대, 중, 소 사이즈 300벌의 양복을 공수하라고 지시했다. 갑자기 300벌을 구하라는 지시에 대한올림픽위원회 직원들은 양복 제조업체들을 뛰어 다녔고 하늘이 도왔던지 양복을 구해 시드니로 보내왔다.
전 세계는 역사적인 올림픽 남북 동시 입장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었다. 물론 이 역사적인 쾌거는 6‧15 남북정상회담의 공동선언과 열과 성을 다했던 남북 올림픽위원회 실무 회담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한민족 전체의 민족애와 열의가 없었다면 쉽게 성사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올림픽이 끝난 후 서울에서는 그해 10월에 ASEM(아시아 유럽정상회담)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시라크 대통령은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남북 동시 입장을 절찬하는 등 오랫동안 세계에 감격의 여운을 남겨 놓았다.
시드니 대회기간 중에도 선수단 간의 남북 화해 무드는 깊어졌다. 서로 함께 식사도 하고 임원들은 어울려 술도 마시고 시합 때마다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는 등 우정을 쌓아갔다.
대회 기간 중인 9월 28일 KOC(대한올림픽위원회) 주최로 열린 리셉션에도 많은 북측 임원들이 참석했다. 북측 체육 관련 고위 인사들과도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북이 공동 입장을 함으로써 한민족에게 얼마나 큰 희망과 감동을 주었는지를 얘기하면서 앞으로 더욱 활발한 남북 스포츠 교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태권도 교류와 같은 단일 종목 교류부터 출발해서 점차 전 종목으로 확산해 가자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고, 그들도 스포츠를 통한 교류가 평화 통일에 선봉이 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면서 굳은 결의를 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