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는 내가 40여 년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온 무도 스포츠다. 태권도 가족이 늘어나고 세계로 확산될 때마다 내 마음은 흐뭇하고 즐겁기 이를 데 없다. 태권도를 통해서 세계가 하나가 되고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태권도의 현대사를 조명해 보면 현대적 의미로 태권도장이 문을 연 것은 1944년 9월의 일이다. 대한태권도협회의 전신인 대한태수도협회가 창설된 것은 1961년 9월이었다. 그보다 먼저 1947년 만주(滿洲)에서 윤병인씨가 권법(拳法)을 들여와 경동고와 YMCA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이원국씨가 들어와 청도관을 창립했다.
IOC가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승인한 것은 1980년 7월 모스크바 총회에서였다. 태권도가 본격적으로 세계화를 시작한 것이 이른 편은 아니지만 1973년 WTF 창설로부터 20년 만에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 되고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유사 종목은 올림픽 종목에 채택될 수 없다는 IOC 규정에 따라 일본의 공수도(가라테), 중국의 쿵푸를 누르고 채택된 태권도의 미래는 더욱 밝은 청사진이 그려지고 있다. 올림픽과 함께 전 세계로 무한정 뻗어나갈 태권도, 이제는 한민족 고유의 무도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세계인의 스포츠가 된 것이다.
한국은 시드니 올림픽에서 태권도로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세웠다.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 해소, 관중들에게 더욱 흥미를 줄 수 있는 경기 규칙의 개정, 장비의 개선 등 해결할 문제점은 많지만 2004년 아테네 이후 계속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태권도, 이제 세계화의 완성이 아닌 완성을 향한 스타트 라인을 벗어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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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태권도를 관람하고 있다 / 왼쪽부터 사마란치 위원장,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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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나는 대한태권도협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나는 외교관 근무 중 돌연 본국으로 불려와 청와대 경호실 보좌관(차장)을 하고 있었다.
젊어서부터 내 꿈은 외교관이었다. 남달리 외국어에 능통한 나는 국방장관 보좌관, 내각수반 겸 외무장관의 의전비서관을 거쳐 주미 대사관과 주 유엔대표부, 주영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와 대통령 경호실 보좌관(차장)으로 근무하라는 발령을 받았다. 청와대 미국 담당 1급 비서관 요원으로 귀국했지만 실제 업무는 푸에블로(Pueblo) 사건과 김신조 일행의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대통령 경호가 중요해진 시점에서 잠정적으로 경호실과 미국 Secret Service와 OSI의 훈련 관계를 도와주고 청와대에서의 한미 관계 강화, 경호장비 도입, 국제정보, 통역, 행사 뒤치다꺼리 등이었다.
1971년 한국 스포츠계의 사고뭉치고 분규 단체였던 대한태권도협회에서 나에게 회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왔다. 당시 태권도계는 심각한 내부 갈등에 빠져 있었으며 대한태권도협회장도 공석 상태였다. 외교관에서 청와대로 온 것부터가 내게 어울리지 않은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분규 경기단체인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을 맡아 달라는 바람에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도 처음에는 강하게 반대했다. 아내가 생각하기에는 내게 외교관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이며 아직은 새 일을 찾기 힘드니 조금만 참고 외교관으로 다시 일할 기회를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청와대 근무 중에도 외교 요직 전출이 논의되었지만 그때마다 연기되어 무산되었다.
나도 대한태권도협회장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스포츠를 좋아했던 나는 외교관 시절에 해외 사범들과 자주 수련도 같이 하며 친하게 지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외 사범들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 그때는 태권도가 안 알려져 가라테 간판을 걸고 가라테형을 가르치는 도장이 태반이었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현지 태권도협회와 도장을 여는 데 앞장섰으며 대회를 개최하는 데 있어서 함께 동분서주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또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사범들이 현지에 도장을 개장할 때 호주머니를 털어 보태주곤 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이종우 관장과 엄운규 관장을 비롯한 태권도인들이 나를 찾아와서 협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태권도를 이끌어 달라고 열심히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태권도를 좋아하고 태권도 유단자인 나였지만 선뜻 대한태권도협회장을 맡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태권도를 이론적으로 연구·분석했다. 태권도는 활동적인 운동이지만 남녀노소 누구나가 가볍게 배울 수 있다. 더구나 태권도는 많은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의를 숭상하며 인격을 완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태권도이기에 세계적인 스포츠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태권도와 함께 일본의 공수도, 유도, 검도도 연구했다. 일본어 교본 서적을 구입해 장점과 단점을 비교해 보았다. 공수의 ‘형’도 함께 연구했다. 그러면서 태권도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립해 가기 시작했다.
태권도의 목적은 정신을 수양하고 육체를 단련하는 데 있다. 운동 부족을 해소하기에도 그만이다. 누구나 가능한 스포츠로 세계화가 가능하다. 외교관으로 쌓아온 인맥과 경험이 태권도의 세계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태권도는 아직 “도”지만 잘 다듬고 정비하여 스포츠화 한다면 세계적인 무도 스포츠로 발전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처럼 태권도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였지만 아직 외교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고 무보수 명예직인 체육 행정가로서의 태권도협회장 수락은 쉽지가 않았다. 맡을 경우,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고민하는 시간들이 길어지면서 반대로 선택의 시간들은 다가오고 있었다. 더 이상 결정을 늦출 수는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