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태권도협회장 직을 수락 하...

나는 깊이 생각했다. 어떤 일이든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6.25 사변으로 인해 젊은 시절 외교관의 꿈도 두 번씩이나 좌절되었지만 그 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 내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장고 끝에 대한태권도협회장직을 수락했다. 내가 태권도협회장을 맡자 아내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아내는 표면상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이 오랜 생각 끝에 결정한 일입니다. 하여튼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세요”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내가 회장직을 수락했다는 것을 전해들은 태권도 사범들은 모두가 환영하였다. 이제부터 태권도는 새로운 도약의 시간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힘과 용기를 얻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나는 굳은 결심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태권도의 미래에는 산적한 과제들이 놓여 있었다.

취임 후 엄운규, 이종우 두 관장을 대동하고 김종필 총재 댁을 인사차 예방했다. 그 때 그 총재는 조직의 장이 누구냐가 중요한데 태권도협회가 좋은 지도자를 모신 것 같다고 격려해주었다. 김종필 총리는 그 후 국기원 개관식에도 참석하고 국기원 정문에 '국기원'이라는 휘호도 써주었다.

당시 태권도는 진흙 속의 진주와 같았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이 혼돈 속에 방치되어진 상태였기에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서 화려한 빛을 발하느냐, 아니면 그냥 시들어버리고 마느냐가 달려 있었다.

과거 몇 년간 태권도협회는 갈 방향을 잃고 있었으며, 더구나 3대 대한태권도협회장을 지낸 최홍희 씨가 친북한색이 짙은 ITF(국제태권도연맹)를 창설하는 등 내외적으로 상당히 혼란한 상황 속에 빠져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반대로 상황을 읽었다. 눈앞에 놓여 있는 혼란 상태를 오히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이를 해결하고 태권도를 진흙에서 꺼내 보석으로 다듬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으로 느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체육을 좋아하였지만 그렇다고 체육계에서 활동하리라는 것은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도 싫지는 않다는 생각은 있었다.

▲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 대의원 총회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대인관계가 원만하기를 원했고, 어떤 일을 하든지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왔기에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불모지에 새로운 꿈을 심고 키워서 커다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은 보람도 있고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만든 태권도 재건 계획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는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는 도장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승단 심사를 시작으로 제반적인 모든 사항을 종주국 대한태권도협회가 직접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까지 태권도계는 마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모양이었다. 일례로 대통령배 대회에서 공수단과 해병대는 견원지간과도 같은 싸움을 반복하고 있었다. 무협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것과 같은 군웅할거 시대로 무덕관, 청도관, 지도관, 창무관, 송무관, 한무관, 정도관, 강덕원, 오도관 등 9개의 대 분파를 시작으로 30여 가지 유파가 난립하고 있었다.

또한 유파 보스들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다른 도장(유파)를 각각 이단시하고, 자기들의 관(유파)들만 인정하는 등 사분오열된 분위기 속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일본 가라테형을 가르치는 도장이 많았고 해외사범들도 도장 이름을 가라테 도장으로 내거는 곳이 태반이었다.

둘째는 태권도를 국기화해야만 한다. 한국에는 고유의 문화에서 나온 국기가 없었다. 그때까지 태권도도 당수와 공수도 같은 무예의 아류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본격적인 스포츠로서 인정되어지지 않았으며, 태권도가 순수한 우리의 전통무예로부터 발전되어 왔다는 역사와 전통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도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셋째는 전 태권도인의 소망인 국기원(중앙도장)을 건설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국기원을 만들어서 각각의 도장에서 지금까지 구태의연하게 해왔던 태권도의 승단 심사와 교육 등을 비롯하여 모든 제반 사무를 일괄 처리하고 구심점으로서 또 무도 스포츠로써 규정도 확실히 한다.

넷째는 태권도를 세계의 스포츠로 끌어올려 국위 선양에 기여한다. 국기원이 한국 태권도의 총본부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전 세계 태권도인의 메카로서 그 구심점이 된다면, 각국에 흩어져 있는 사범들과 외국 태권도 수련자들을 통합하는 것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태권도 교본의 발간과 전문지의 발행, 사범교육과정 개설, 국제경기연맹 가입, 그리고 국제 경기를 정기적으로 개최함으로써 무도였던 태권도를 무도 스포츠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었다.

이 4가지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국기원(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을 건설하는 것이 급선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