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을 친구로 삼다 (35회)

’84년 LA올림픽 참가를 보이콧한 소련의 참가 문제는 서울 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하는 데 있어서 필수조건이었다. 여러 가지 곤란하고 불리한 조건 아래에서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와 IOC는 함께 끈기 있게 소련을 설득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만약에 세계스포츠를 양분하는 소련과 동유럽권이 불참하면 경기 수준과 대회 규모, 정치 외교의 실패, TV 방영권 감액 등 상상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1988년 1월 10일 소련은 공식적으로 서울 올림픽에 참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안심을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잠실 스타디움에 소련이 자국의 국기를 게양하고 입장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소련의 참가 결정에 영향을 미칠만한 예측불허의 사태가 발생할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 관계자가 소련의 공식 참가를 통보 받고 나서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깜박 말실수를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말았다.

“소련의 참가 결정은 우리에게 믿음직한 총알받이 역할을 해 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소련은 펄쩍 뛰며 화를 냈다.
“소련이 한국의 총알받이 역할을 해 줄 것이라고?”

서울 올림픽 참가를 결정했지만 소련에 있어서 북한은 아직도 우방이었다. 소련의 입장으로서는 이것저것에 대해 신경을 써야만 할 것들이 남아 있었다.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소련을 자극하는 발언이 튀어나왔다. 물론 미국에서조차 소련의 입장을 주시하고 있던 시기였으니 간단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급히 티토프(Yuri Titov)를 만났다. 그는 세계체조연맹회장으로 소련올림픽위원회 사무총장이었다. 나와는 이전부터 GAISF에서 늘 함께 일하던 동료였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단지 소련의 참가를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다. 군사적인 담보라고 하는 말은 오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한국과 소련이 서로가 신뢰를 돈독히 하는 관계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티토프를 이해시키는 것은 성공했지만, 역시 말을 조심하지 않으면 실패할 가능성도 크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소련의 참가는 서울 올림픽의 최대 과제였다. ’80년 모스크바와 ’84년 LA 올림픽이 동서 진영의 프라이드와 자존심이 걸렸던 대회였기에 ’88 서울 올림픽이 12년 만에 보이콧을 없애고 양진영의 화합 차원에서도 소련의 참가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소련이 불참한다면 완벽한 올림픽 개최는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당시 소련은 15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임원들의 신분증이 필요했다. 그래서 소련 선수들에게는 추가임원(extra official) 600명의 신분증을 발급하기로 했다. 이것을 알아낸 미국 NOC가 그들도 같은 대우를 요청하는 등 어려움도 발생했다. 그렇게 하면 올림픽 임원이 포화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 1988년 소련 Gramove 체육장관, Gavrillin 체육차관과 함께

또한 소련 선수단과 임원들을 위하여 올림픽 기간 중에는 가까운 항구에 자국 국적의 배를 정박시킨다는 관례를 갖고 있었다. 멜버른(Mebourne), 몬트리올(Montreal),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등에서도 그랬다. 따라서 서울 올림픽 참가를 위해서 입국하는 경우에도 인천에 정박할 것을 요구했다. 이 보고를 들은 전두환 대통령이 난색을 표시하고 불가방침을 내렸다.

“선박을 인천항에 계속하여 정박하겠다고 하는 것은 스파이 활동을 하겠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당시 상황에서는 소련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그 정도뿐이었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소련의 선박은 우리나라에 절대로 들어올 수가 없다’라는 것이었고, 소련의 입장도 이것에 뒤지지 않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선박을 정박시킬 수가 없다면 소련은 올림픽에 참가할 수가 없다.’

흘러가는 분위기가 소련의 참가 자체가 물거품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접적으로 설득하는 방법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두가 어려워서 아무도 전두환 대통령에게 가려하지 않았다. IOC위원인 내가 올라갔다.

“그들이 스파이 활동을 하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처럼 우주로부터 인공위성이 모든 것을 알아내는 시대에 그와 같은 배 한 척이 15일간 정도 정박한다고 해서 스파이 활동을 하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당시의 KGB의 능력으로 판단한다면 그들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떠한 정보라도 손에 넣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스파이 활동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만의 습관에 따라서 배에서 선수단을 안전하게 휴식시키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그들과 접촉하여 소련 선수단이 선수촌에 입촌하되 휴식과 컨디션 조정을 배 안에서 행하며, 한국 국내법과 IOC 헌장을 지킨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소련과의 교섭 결과를 자세히 설명하자 전 대통령은 “소련이 우리 법과 IOC헌장은 지킨대? 그렇다면 허가하지” 하고 그 자리에서 전화로 지시했다.

소련의 서울 올림픽 참가는 우리가 예상하지 않았던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 냈다. 그 이전까지는 전혀 상상을 할 수 없었던 신기한 상황들이었다. 우리나라의 국민들이 경기장에서나 TV를 통해서 소련 팀의 경기를 열심히 응원하고 소련 팀이 선전할 때마다 환성을 올렸던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소련을 북한 다음으로 꺼려하는 적대국가로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서울올림픽에서는 소련이 1위, 동독이 2위, 미국이 3위, 한국이 4위였다.

올림픽을 유치하고, 경기를 개최하는 속에서 더 이상 적도 없고 동지도 없다고 하는 국제사회의 질서와 올림픽의 위대함을 피부로 이해하게 되었다. 전 세계의 관심을 집중시킨 서울 올림픽.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대처하지 않았고, 소련과 동구권을 비롯한 공산 진영을 가슴을 열고 받아들인 점들이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화를 추진하는 데에 커다란 밑받침이 되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특히 소련의 서울올림픽 참가는 올림픽을 통한 동서 화합의 가장 커다란 성공이었고, 가장 수준이 높았던 올림픽 개최였을 뿐 아니라, 세계의 한쪽 구석으로 인식되어 오던 살아온 한국을 세계 속에 심었고, 더불어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우리의 기개를 알릴 수가 있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서울올림픽은 우리 국민의 의식개혁을 이뤄냈다. 우리도 해냈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