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공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다. 귀가 뚫려야 입이 열리기 때문이다. 내가 중, 고등학교 시절에 미국 군인들이 하는 말을 그저 듣기만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그때는 흥미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외국어를 몸에 익히는 가장 초보적인 단계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우리나라 외국어 교육은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외국인과 자유자재로 회화조차 할 수 없는 결함 투성이 교육이다. 우리는 지금 정반대인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순서로 배운다. 이제는 외국어 교육 방법이 조금 진전되어 겨우 대학 시험과목에 듣기 시험이 시행되고 있지만, 하루라도 속히 외국어를 실용 위주의 교육 방법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교사와 학생이 대화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외국어를 몸에 익혀 가는 환경이 갖추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외국어 학습의 또 다른 방법 하나는 ‘외국어로 생각한다’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외국어를 말한다’는 것을 혼자서 실천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배가 고프다고 느끼면 ‘배가 고프다’라고 생각해 그것을 혼잣말처럼 말하고 싶어 한다.
먼저 생각하고 나중에 말이 나온다. 물론 그것을 자기 나라 말이기에 생각하고 말하는 과정을 별로 의식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인식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데 엄밀하게 규명하면 말하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이 먼저다. 그렇기에 ‘배가 고프다’ 라는 극히 단순한 것도 외국어로 바꾸어서 생각하는 버릇이 필요가 있다.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때마다 외국어로 고쳐서 생각하고 그것을 입으로 말하는 습관이 들면 외국어를 생활 속에서도 가깝게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무턱대고 책상에 앉아서 단어와 문장을 계속해서 암기한다는 것은 투자한 시간에 비해 별로 소득이 없을 것이다. 나는 방학이 되면 다음 학기에 배울 공부를 미리 대부분 해 놓았다. 그렇기에 학기 중에는 여유가 생겨 다른 과목의 공부를 했다. 외교관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나는 영어 이외에도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틈나는 대로 공부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영어를 초보단계에서부터 체계적으로 다시 공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많이 읽고 들으면서 암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체계적인 외국어 학습을 받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그때 연희대학에는 외국인 교수도 많았고 영작문시간에는 프로보스트(Provost)라는 선교사가 발음법부터 시작해 성경 구절을 외우게 했다.
체계적인 학습을 받기 시작하자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내는 능력을 키웠다. 일단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찾으면 그 방법을 바꾸지 않고 지속적으로 내 몸에 침투할 정도로 노력하는 것이 다음 단계였다. 노력을 하다보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자기만족에 빠지는 경향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금물이다.
세상이 변하면 언어도 변한다. 끊임없는 노력이 없으면 사상누각처럼 한순가에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어학에는 끝이라는 것이 없다. 나도 역시 사전을 뒤지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이동 중인 승용차 안에서는 영어 방송을 듣거나 알지 못하는 단어가 있으면 스스로 사전을 찾아 납득이 갈 때까지 사전을 놓지 않는다.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겠지만 언어는 습관이며 외국어 학습의 비결은 평생 계속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시작하는 데에 연령적으로 보아 늦었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물론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습득하기 시작한다면 그 쪽이 훨씬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좌절부터 하고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나는 ’88년 서울 올림픽 때에 구(舊)소련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 나라의 언어를 알고 나서부터야 그 나라 사람들과 대화가 더욱 자유로워지고, 러시아어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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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년 7월 러시아 방문 때 / Gramove 체육장관과 Gavrin 차관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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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석상에는 통역이 있어서 별다른 불편을 느낄 수가 없지만 만찬이나 리셉션, 구체적인 세부 사항까지 들어간 문제를 토론하는 회합이나 세미나 등에서는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말을 하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배운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절실한 과제였다.
그 당시에도 이미 5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나는 러시아어를 배운다고 하는 점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공부에 임하였다. 그리고 소련 참가 문제로 자주 소련을 방문하여 도움이 되었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연령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그때 내가 열심히 배운 러시아어는 소련연방의 붕괴 직후, 보다 긴밀해진 대(對)러시아 외교에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어학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다. 꿈을 성취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조건이 준비될 때까지는 어떠한 난관에 봉착한다 하더라도 성공을 해야만 한다. 외국어를 처음 시작할 때 나는 신생 조국의 외교관이 되어 세계로 도약하고픈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기에 외국어 공부 자체가 즐거웠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 소총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군인이라고 볼 수 없다. 같은 경우로 국제화시대에 조국을 짊어지고 나가겠다고 생각하는 젊은 사람이 외국어 하나쯤은 마스터하고 나서야 세계를 상대로 어느 정도 경쟁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연희대학 들어갔을 때 백낙준 총장이 영어를 공부하라고 강조하신 말은 지금도 잊지 않는다.
지금 바로는 자기가 할 역할이 없다고 해도 어느 한 가지 외국어를 완전히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가 있다면, 언젠가는 꼭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역할을 할 때가 올 것이다.
세계는 하나의 가족이다. 영어는 더 이상 외국어가 아니고, 국제화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필수 생존 수단인 것이다.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자금, 즉 자본이 필요한 것처럼 외국어는 앞으로 세계를 상대로 전개할 모든 사업에 필요 불가결한 무기요, 자산인 것이다.
6.25전쟁이 난 후, 고시도 못치고 군에 입문해서 최전방에서 3년이나 참전하는 바람에 외교관 꿈은 한동안 뒤로 처진 상태였다. 내가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5․16 군사 혁명 이후 내각수반 겸 외무장관 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카이로 총영사나 콩고 대리대사로 내정된 적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1963년 주미 대사관 참사관으로 명받아 부임한 것이 최초였다.
당시 국내 정치를 뒤돌아보면 군사혁명 직후였고 미국의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로 나라가 움직일 때였다. 또 민정 이양의 과도기였기에 경제적으로 아주 곤란한 때였다. 국제적으로 보아도 한국에 대한 인식은 낮았고, 정치적 경제적 후진국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주미대사관의 주 임무는 미국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경제원조를 제대로 받아내는 것이 제일의 우선 과제였다. 그 다음 임무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올리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부임지인 워싱턴에서 나는 많은 시간을 공항에 손님을 보내고 맞이하는 단순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외교라는 것은 역시 인내심이라고 하는 것을 실감한 것도 바로 그때 당시에 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