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외교관으로서 자기 직분과 책임에 뜨거운 열정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세계 각국의 대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활동하는 것 이상으로 내게 더 잘 어울리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런던에서 주영대사관에 근무하고 있을 때 1968년 내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푸에블로(Pueblo) 호(號) 사건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발생하였다. 국내 정세가 매우 어지러워졌고, 무엇보다도 한미관계가 한층 더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던 박종규 씨에게 연락이 왔다.“지금 청와대는 미국 문제를 담당할 일급 비서관이 필요합니다. 즉시 귀국하십시오.”
그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미국을 잘 알고 있던 전문가는 많지가 않았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다년간 한미군사협력의 선두에 있어왔고 워싱턴과 뉴욕의 조야와 교류가 많았다. 나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며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막상 내가 맡은 일들은 기대하고 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당시 대통령 경호관들은 미국의 Secret Service와 공군 특수부대(OSI)로부터 특수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내가 맡은 임무는 그들을 돕고 대통령 경호실 기능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우선 이 일부터 한 후에 대통령 비서실로 옮기라는 이야기였다. 그 후 우리 무술 요원을 데리고 워싱턴에서 두 달 간 OSI 요원들을 훈련시켰다.
아내는 “본국 정부로부터 이용 당한 것은 아닙니까?”라며 가슴 아파했다. 나 역시 적성에 맞던 외교관직을 그만두게 된 것이 못내 가슴에 맺혔다. 그 이후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몇 번은 다시 해외로 나가는 것이 거론 되었지만 다시 외교관으로 기용되는 일은 국내의 급박한 사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고민도 했다. 개인적인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미국의 회사들에서 좋은 조건으로 오퍼(Offer)도 있었다. 공부를 계속해 한때나마 꿈꾸고 있던 국제법 학자로서의 길을 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평생 학자로서의 길을 간다는 것이 내게 어울리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생겼다. 직장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강의 경험도 있던 대학 교단에 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선택할 인생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문제로 끝없이 고민을 했지만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일에 정열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대학 시절 내가 크게 감명을 받았던 백낙준 총장님의 말이 떠올랐다.
“국제 지향적인 큰 뜻을 품고 세계를 이끌어 나갈 실력을 갖추어라! 영어 공부를 하라!”였다. 그런데 지금 나로서는 외교관의 길이 막혔으니 어찌해야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가 있을까 하고 고민할 뿐이었다. 또한 청와대로부터 부름을 받고 돌아온 몸이라 섣불리 행동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당분간은 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고국에서 조용히 가족과 함께 충실히 생활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자 기분이 훨씬 가벼워졌다. 무엇보다도 젊어서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어머니를 가까이서 모시고 생활할 수가 있게 되어서 기뻤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그때까지 충분하게 대화를 나누지 못해 항상 미안하게 생각했던 아이들에게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가 있다는 점이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어머니가 허무하게 돌아가시고 말았다. 얼마간 미국 워싱턴에 출장을 다녀온 사이에 어머니는 위독한 상태에 빠져서 누워 계셨다.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난 후, 정신없이 살다가 이제야 조금 여유를 갖고 그동안 못 다한 효도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일찍 아버지를 떠나보내시고 홀로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을 뒤로 하시고 그렇게 조용히 떠나셨다. 내게 열차 안에서 테이블 매너를 가르쳐 주던 어머니. 넓은 안목으로 세상을 보라고 어릴 적부터 영어 공부에 눈을 뜨게 해주셨으며, 피아노를 통하여 풍부한 감성을, 스포츠를 통해 심신 단련을, 그리고 넓고 포용력이 있는 인간성을 키울 수 있게 만들어 주셨었다.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배려와 사랑은 내가 세계를 상대로 일을 하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선견지명과 사랑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가지셨을 때 이런 태몽을 꾸셨다고 했다. “신선이 산 위에서 엄청나게 큰 바윗돌을 집어던져서 엉겁결에 그걸 턱하고 가슴으로 받아 안고는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고 말씀하셨다.
“넌 아주 큰일을 할 것이다. 작은 일에 욕심을 두어 큰 뜻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되지 마라. 언제나 한 발 앞서서 멀리 내다보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기회를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실력도 중요한 법이다.”
1971년 생각지도 않았던 제의가 나에게 들어왔다. 태권도협회장이 되어 줄 것을 부탁 받은 것이다. 젊어서부터 운동이 좋아 체육인들과 교류가 있었지만 체육행정가가 된다는 것은 나의 꿈과도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계속된 권유를 받고 나자 냉정하게 거절하는 것도 곤란했다.
나는 외교관을 그만두고 경호실 보좌관(차장)이 되었을 때에도 무척이나 많은 고민과 갈등을 했었다. 청와대 근무만 해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대의명분이 있고, 언젠가는 다시 외교관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현실적인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하여도 경제력이 약해 정부가 지원을 못했고 관료들이 주로 맡아 왔던 체육계의 협회장직을 맡는다는 것은 그동안 꿈꾸어 왔던 나의 모든 희망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 나이 겨우 40밖에 안 되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고민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별로 없었다.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시간이 점점 좁혀오고 있었다.
이렇게 내가 고민에 빠져 있을 당시 이종우, 엄운규 등 많은 태권도 관장들이 찾아와서 협회장직을 수락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들은 예전에 내가 외교관으로서 능력을 발휘했던 것과 같이 현재 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태권도협회를 위해서 큰 역할을 담당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그 당시 태권도협회는 최고의 골치 아픈 사고단체였다.
또한 태권도는 국제적으로도 점차 알려지고 있어서 외교관 못지않게 세계를 상대로 큰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였다.
나는 재미 대사관과 주UN 대표부 근무 시절 태권도 도장을 열고 싶지만 재정적으로 사정이 어려운 사범들에게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고, 대회 개최를 함께 주선하기도 했으며, 가끔씩 집세를 못 낼 경우에는 대신 내주기도 했다. 그리고 자주 도장에서 수련을 하기도 했다. 그때 해외도장은 아직 가라테 도장 간판을 걸고 있었다. 주영 대사관에 근무할 당시에는 영국 외무성과 유지들을 설득, 영국의 태권도협회 설립도 도와주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나는 아내에게도 몇 번인가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 드디어 나는 협회장직을 수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