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15일부터 18일까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제104차 IOC 총회가 개최되었다. 우리 한국으로서는 또 한 명의 IOC 위원이 나올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나 IOC 전체로서는 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임기를 또 다시 연장하여 4선 출마를 할 것인지 아닌지가 더욱더 큰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IOC, 위원의 종신제가 중요한 의제로 올려졌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한 IOC 위원의 추가 선출 문제에 관한 토론은 다음 총회로 미루기로 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IOC 위원장 선거에 집중되고 있던 사이에 나는 며칠간 비밀 작전에 전념하고 있었다.
’99년에 예정된 제108회 IOC 총회를 서울로 유치하기 위해 은밀한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 유치의 라이벌 도시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와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 그리고 이탈리아의 로마를 비롯하여 독일과 네덜란드, 뉴질랜드 등이었다.
나는 총회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뉴질랜드 등의 대표들과 만나서 서울 유치를 지지해 달라며 호소했다. 그 결과 이들 국가들은 유치 신청을 포기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서울과 리우데자네이루, 그리고 아디스아바바였지만, 최종적으로는 서울과 리우데자네이루 두 도시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2000년 올림픽 유치 신청을 한 적이 있던 리우데자네이루는 2004년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더구나 ’99년 총회에서는 20세기 마지막 총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 총회에서는 2006년 동계올림픽의 개최지를 결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브라질은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여 유치 활동의 선두에 나설 정도였다.
리우데자네이루 유치 활동의 선두에 나선 사람은 세계 축구계의 황제라고 불리던 아벨란제(Havelange)였다. 그는 IOC 위원임과 동시에 세계축구연맹(FIFA)의 회장이기도 했다. 아벨란제는 IOC 위원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세계 스포츠계를 움직이는 사람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막강한 실력자였다.
또한 브라질에는 IOC 위원이 2명이 있었다. 아벨란제 외에 종신 위원인 바딜라가 있었는데 그 또한 영향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수적으로 보면 우리 한국의 절대적인 열세였다. 만약 표 대결까지 간다면, 서울은 한 표뿐이지만 브라질은 이미 두 표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었다. 더욱이 남미와 스페인 등 라틴계의 지지 기반은 20여 표 정도가 있었다. 브라질에 유리한 판도는 변하지 않았다.
IOC는 1년에 한 번 총회를 개최한다. IOC 총회는 올림픽 그 자체와 비교하면 규모 면에서는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올림픽을 좌우하는 조직의 총회이기에 국제회의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특히 ’99년 총회는 20세기 마지막 총회이고, 2006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총회다. 이 총회에 IOC 위원과 국제 경기연맹 위원들을 비롯하여 동계올림픽 유치를 원하는 국가들과 도시 대표단이 수천 명 규모로 참가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IOC 관계자와 신문, 방송 등 보도진을 합한다면 수천 명이 총회 개최 도시로 몰린다. 여기에 각양각색의 문화 행사와 세미나 등이 개최되고, IOC의 각종 현안들이 의제로 다루어지며, 각국이 자국이 이익을 위하여 열심히 경쟁을 펼쳐 보이는 뜨거운 각축장이 된다. 또 IOC 역사에도 남는다.
당연히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고, 총회 개최국은 그것만으로도 전 세계를 향해 자국을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며, 커다란 효과도 거둘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서울과 리우데자네이루는 모두 총회 유치를 위하여 양보할 수 없는 강력한 경쟁을 벌였다.
리우는 세계 환경 회의를 개최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던 도시였다. 자연 경관도 아름답고, 관광자원도 풍부하여 세계인들이 꼭 한 번은 방문하고 싶은 도시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리우는 이번 유치 경쟁에 대비해서 설명 책자와 비디오테이프까지 준비를 하는 등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우리도 뒤질세라 설명 책자를 만들었다. 그 안내서에는 총회에 필요한 준비 상황과 관련 자료 등 과학적이고 기술적으로 정리가 잘 된 내용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리우 측의 선전 책자는 관광 가이드북과 같은 수준이었다. 내용을 보면 브라질 대통령의 소신을 게재하고, IOC 총회 유치를 희망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요청한다는 점, 그리고 리우가 매력적인 도시라고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을 뿐 IOC 총회 준비 상황 등에 있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서울과 리우를 비교 설명했더니 무슨 소리냐 사실 리우가 훨씬 매력적인 관광도시라고 했다. 시사하는 바가 컸다.
우리는 외교적인 힘을 발휘한 결과 리우가 준비한 비디오의 일방적인 상영을 금지시켰다. 비디오 상영을 준비하지 못한 우리 측에 있어서는 명백하게 불리한 상황을 초래하는 것은 뻔한 일이었기 때문에 “공평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요청을 했다. 그 요청에 따라서 투표 대결 직전까지 비디오의 상영을 금지시킨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나에게 “금번 총회 유치는 리우에게 양보하고, 아벨란제 측으로부터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할 때에 협력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하고 말해 왔다.
부다페스트 총회가 개최되기 직전 스웨덴에서 열린 국제여자축구대회에서 사마란치와 아벨란제가 만나 이러한 의견 교환을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사마란치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울이 리우데자네이루에게 양보한다고 한다면 아벨란제로부터 어떠한 협력을 받을 수가 있게 됩니까?” 월드컵은 일본과 어떻든 유치 경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경쟁에서 이겨야만 비로소 유치가 되는데, 이 총회에서 유치를 철회한다고 해서 브라질로부터 반대급부를 받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지금까지 스포츠에 있어서 많은 발전을 해 왔으며, 21세기에도 올림픽 운동을 위해서 수많은 기여를 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이번 유치 경쟁에는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
나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난 사마란치는 결의가 굳어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고 하며, 마지막까지 정정당당히 최선을 다해 주기를 바란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만약 그때 당시 우리가 양보를 했다고 해도 리우로부터 특별한 도움을 얻는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국제적인 관계 개선에도 좋은 영향이 있다고 한다면 양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가 양보한다는 대의명분이나 정당한 이유가 미미한 상태였다.
더구나 우리가 투표에서 진다든지, 또는 유치를 포기할 경우 그들은 우리를 비웃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만약 우리가 한발 양보한다고 한다면 그들은 우리를 영원히 무시하고 가볍게 볼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런 패배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또 이때는 IOC 내에 나의 세력 기반이 강할 때라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외교는 힘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때 우리는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하려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사마란치 위원장이 99 총회를 양보하고 FIFA 월드컴 유치에 도움을 받으면 어떠냐는 제안이 있었지만 아벨란제 성격상 그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타진했더니 교환 조건에 응하지 않아 투표에 집중했다. 이탈리아의 카라로(Carraro) 의원이 아벨란제 대신 교섭을 하러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