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럼 ‘동방불패’라고 할 수 있군요.”
언젠가 내 개인선거나 대회유치 선거가 표 대결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장소에 있던 젊은 기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뭐 동방 불패라고요?” 갑자기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젊은 기자에게 다시 물어보자, 그가 쑥스럽게 웃으면서 설명해 주었다.
‘동방 불패’는 중국 영화의 제목으로 영화 속에서 무림 최고의 달인을 칭하는 말이라고 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거에 나서거나 국제대회 유치에서 국내에서 명예를 걸고 싸워온 모든 투표 대결을 포함하여 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패배를 모르는 동방의 사나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사실 나는 지금까지 승부에서 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승부는 IOC 부위원장 선거다.
1992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직전의 일이다. 시내 소피아호텔에서 IOC 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입후보자는 나와 일본인 이가야 치하루 씨였다. IOC에는 집행위원이라는 직책이 있는데 집행위원에 선출이 된 후 4년이 경과하면 부위원장의 지위에 오르거나 아니면 집행위원으로부터 제외되는 것이었다.
’88년에 집행위원에 선정된 나는 ’92년 부위원장 선출을 둘러싸고 일본의 이가야 씨와 경합했다. 당시의 관례로는 집행위원 중에서 단일 후보를 선정하여 무투표로 선출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나와 이가야 씨는 누구도 양보하지 않고 경합을 벌였기에 결국은 투표로 결정하게 되었다.
나는 애초에 스웨덴의 에릭슨 위원이 출마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자기가 고령이라는 이유로 투표 직전 사퇴하고 앞으로 일을 많이 해야 할 사람이라고 나를 지지한다고 했다.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동계올림픽(이탈리아)에서 은메달을 딴 일본의 영웅 이가야 씨는 국제 체육계에서는 신인 축에 속했지만 ’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최를 전면에 내세우며 활발한 선거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선수 출신으로 IOC 위원이 된 경력과 일본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착실히 득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나 역시 한국의 국력이 IOC 부위원장의 지위에 도전할 수 있을 만큼 높아졌다고 생각했고, 사마란치 위원장의 권고도 있어 열심히 득표 활동을 했다. 내 판단으론 충분히 승산 있는 싸움이었다. 나는 또 6.25 사변 내내 최전방 근무를 하는 바람에 올림픽에 나갈 수 없었지만 전국육상대회에도 나간 선수였다.
“여기저기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김 형(나는 그보다도 연상이었고, 유교를 존중하는 풍습에서 이렇게 불렀다.)에게 기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사마란치의 뒤를 이어 IOC 위원장이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김유순 북한 IOC 위원도 나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다정하게 위와 같이 말을 걸어 왔다. 또 나를 응원해 준 사마란치 위원장은 그때까지도 산전수전 다 겪은 거목답게 노련했다.
“선거는 뚜껑을 열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마지막까지 겸허하게 최선을 다하고 4중, 5중으로 다져야 합니다.”
그의 충고는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활동하면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결과는 사람들의 예측을 크게 빗나갔다. 54대 28이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내가 이가야 씨를 누르고 IOC 부위원장에 당선되었다.
선거가 끝난 직후 사마란치 위원장은 “아주 쉬웠군요”라며 선거 전과는 전혀 다른 분석을 해보였다. 그는 “사실인 즉 유럽 표를 대량으로 갖고 있던 에릭슨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사마란치는 내가 방심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으로 나에게 경계심을 잊지 않고 불어넣어준 것이었다. 이가야 위원에게 큰 표 차로 이겼기 때문에 IOC 부위원장으로서 일을 하는데 있어 상당히 수월할 수 있었다. 만약 반대로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다면 내 발언권은 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가야 위원과는 그 이후로도 서로 좋은 친구로서, 좋은 라이벌로서 교우 관계를 지속해 오면서 협력해 오고 있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나의 이러한 갑작스런 스피드 승진에 대해서도 정당한 평가를 해 주었던 것 같다.
국제무대에서라고 하여 특별히 다른 처세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당선된 배경에 대해서 냉정히 분석해 보면, 우선 IOC 위원들이 나의 실력과 헌신적 노력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음으로 누구에 대해서도 공평하게, 거리를 두지 않고 편 가르지 않는 인간적인 친분관계,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면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프리카의 작은 국가부터 세계를 좌우하는 강대국의 IOC 위원까지 항상 동등하게 대우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개 인종적인 우월의식을 갖고 있던 일부 앵글로색슨계 사람들을 제외하곤 다른 IOC 위원들이 나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된 것 같았다.
모든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똑같이 중요하다. 자기가 맡은 일들을 성실하게 처리하고 신의를 지키며, 모든 과정이 언행일치 되어야만 비로소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항상 겸허하게 행동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물론 이해관계도 소중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성실함 속에 전부 포함되어 있다. 상대를 얕보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성심을 다하여 큰일을 해 나가야 한다. 특별한 재능을 발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때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모든 것에는 ‘때(타이밍)’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단지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때(찬스)가 찾아오면 그 기회를 자기 손아귀에 적극적으로 움켜 쥘 수 있는 판단력과 실력이 필요하다.
2002년에 동양에서 월드컵을 개최하기로 세계적인 합의가 있었기에 한국과 일본이 발 벗고 나서서 유치 경쟁에 열을 올렸다. 나도 역시 스스로의 노력으로 세계를 무대로 도전해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세계의 흐름을 잘 파악할 수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동양의 3개국,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 한국이 세계적인 관심의 표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한국과 일본, 중국은 항상 세계 속에서 동양의 대표 주자로서 힘을 겨루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바하 IOC위원장은 2018 평창, 2020 도쿄, 2020 베이징 등 연달아 아시아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된 것을 보고 이제 아시아의 시대가 왔다고 한다.
일본과는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개최지를 놓고 경쟁하였으며, 얼마 전까지는 월드컵 유치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한 경험이 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대 중국 무역 전쟁이 예상되어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완벽한 실력을 갖춰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부터는 그야말로 개인의 실력을 바탕으로 한 경쟁력이 즉 국가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 집행위원회는 2000년 7월 14일 터키의 이즈미를 19대 4로 누르고, 2003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대구시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중국이 절대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이에 따라서 KOC(대한올림픽위원회)는 ’86년 아시아대회, ’88년 서울 올림픽, ’97년 무주․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 ’97년 부산 동아시아 경기대회, ’99년 강원도 용평 동계 아시아 경기대회, ’99년 IOC 총회 서울 개최, 2002년 월드컵 한국 일본 분산 개최, 2002년 부산 아시아 경기대회 개최 등 모든 종합 경기대회와 국제회의 유치에 성공하였으며,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유치까지 성공을 하였다.
당초 2003년 유니버시아드 개최지 문제는 유럽 대국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터키의 이즈미가 유력한 후보지로 부상한 가운데 한국의 대구, 러시아의 모스크바, 멕시코의 몬테레이 등 4군데 도시가 치열한 각축을 벌일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와 몬테레이가 2005년 유치로 계획을 바꿔 유치 신청을 철회한 덕분에 대구와 이즈미만 대결하게 되었다.
결선 투표 전에 터키의 이즈미는 유럽세의 지원을 배경으로 고대 유적과 비잔틴 문화를 갖고 있는 유력한 개최 후보지라고 강조하였는데, 우리 측도 완벽한 경기장 시설 준비와 경주의 문화관광 자원 등을 연결한 유치 대표단의 효과적인 대응이 힘을 발휘했다.
나도 IOC 위원이라는 자격과 함께 GAISF 회장으로서 강력한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이번 유니버시아드 대회는 당초 대구시가 2001년도 대회 유치를 신청했는데, IMF 사태가 발생하여 중국 베이징에게 양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 자신도 대구시의 문희갑 시장을 전면에 내세워, 길리언(Killian) FISU 회장 등에게 강력한 지원요청 활동을 한 끝에 유치권을 얻어 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