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기초교육의 안내인이 되어주신 은사는 홍재익 선생님이다. 홍 선생님은 내가 장래에 외교관이 되는데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신 분으로 가장 존경하는 은사님 중의 한 분이기도 하다. 홍 선생님은 젊었고, 세련된 매너를 갖추어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그분의 나를 잘 이해해 주셨다.
홍 선생님은 나중에 제1회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외교관으로서의 길을 걸으셨다. 전국에서 4, 5명을 채용하는 아주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 외무부로 근무처를 옮기신 선생님은 내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하와이 부영사로 발령을 받았지만 부임하지는 않았다. 당시는 모든 분야가 불안정한 과도기였기에 이른 바 윗선이 강하게 작용하는 때였다. 나중에 홍 선생님은 제일은행 상무로 취임하였다.
홍 선생님을 만난 뒤, 드디어 나는 장래 선생님과 같이 외교관이 되어서 한국의 명예를 걸고 다른 국가 사람들과 경쟁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연희대학(현재의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연희대학에 진학한 것은 당시 외교라고 하는 말이 들어간 과가 있는 학교는 연희대학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유와 진리를 슬로건으로 한 연희대학은 당시 어느 대학보다도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세계의 유행에 민감히 반응하고 있었고, 외국의 선진 교육을 받은 교수진이 정열적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또 외국인 선교사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 외국의 선진 문화를 접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서구 사상을 배울 수가 있었다.
그때의 연희대학교 총장 백낙준 박사의 축사 중에는 “우리나라는 지금 신생 독립국가로서 글자 그대로 새롭게 탄생한 것입니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36년간이라는 일본의 침략기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지독한 암흑의 세계를 강요당했습니다. 그러나 해방을 맞은 지금 어두운 과거의 터널로부터 탈출하여 세계를 향한 날개를 펼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신생국인 한국의 용감하고 유능한 인재들로서 가장 자유롭고 창의 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연희대학 교정에 지금 서 있는 것입니다. 학생 여러분!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부에만 신경을 쓰지 말고, 밖으로 눈을 돌려야만 합니다. 세계 정서에 소외되고 나라마저 잃어버리는 우를 범한 역사를 되풀이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세계를 리드하는 인물이 되겠습니까? 세계는 넓고 여러분들이 도전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큰 포부를 가지고 대학 생활을 뜻 깊게 보낼 수 있다면, 이 나라와 이 세상이 여러분들에 의해서 이끌어져 나갈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 나는 백 박사님의 가르침 덕분에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론적인 기초 지식을 많이 얻을 수가 있었다. 60여 년 전의 이야기지만 세계를 향해 큰 야망을 품고 인격적으로 풍부한 덕망을 배양하라고 강조하셨던 백 박사님의 말씀은 지금 이 시대에도 명심해야만 할 귀중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연희대학에 다니던 시절 나의 영어 실력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선교사 언더우드 박사의 부인이 현대 영어를 가르치고 계셔서 그 분은 나의 미숙한 영어를 세련되게 사용하고 다듬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주셨다. 세련된 서양 미인이셨던 사모님은 매일 깔끔하고 단정한 차림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우리의 눈도 즐겁게 해 주셨다.
프로포스트 교수는 영작문을 가르치셨는데 발음법을 시작으로 완벽한 영작문을 작성하게끔 작문도 지도해 주셨고, 성서(Bible)의 문장도 외우도록 하셨다. 우리는 성서의 산상 설교와 고린도 전서 등을 수 없이 암기하면서 성서를 통하여 서구인들의 사상과 문화를 조금씩이나마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필립스 교수는 ‘민주 정부론’을 원문으로 강의해 서구의 정치철학사상을 우리에게 이해시켜 주셨다.
런던대학에서 음성학을 전공해 나중에 문부성 차관을 역임한 김성기 박사가 영어구독을 가르치셨다. 한번은 칠판에 이솝의 동화 한 페이지를 써 놓으시고 난 다음 곧바로 지우셨다. 그런 다음 우리에게 질문하셨다. “누가 지운 문장을 전부 암기할 학생은 없는가?” 하자 곧바로 이원익이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한 줄을 기억하지 못했다. 또 다른 몇 명의 학생이 도전했지만 전부 실패했다.
내가 마지막에 나서서 문장의 마지막까지 암기해냈다. 김 박사님은 “이런 학생을 가리켜 신동이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실은 학우들이 몇 번이나 반복해 주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나선 내가 전부 암기를 할 수가 있었다. 운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대학 1학년 때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지금도 자부할 수가 있다. 아무리 두뇌가 좋다고 하여도 노력하는 인간에게는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나의 대학 생활은 한국동란의 발발로 2학년 때 중단되고 말았는데 그 당시 내가 배웠던 것들은 인생에서 가장 귀중하고 가치가 있었던 것들이었다.
나는 1949년에 입학한 연희대학을 그 이후 10년 뒤인 1960년에 정식으로 졸업할 수가 있었다. 오랜 군 생활과 미국 유학을 마치고 모교에 돌아와 마침내 졸업장을 받았다.
어느 시대든 힘들고 어려운 역경이 뒤따르지만 나의 젊은 시절은 그 자체가 한국 근대사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어둡고 고통이 가득한 시간속에서도 빛을 찾아서 전진하는 순간이 많았다. 젊어서 내가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불운을 세상 때문이라 한탄하며 하루하루를 안일하게 보냈더라면 과연 오늘날의 모습은 어땠을까 가끔 생각해 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