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만 년 민족 최대의 역사(役事)라 할 수 있는 서울 올림픽 개최의 시발은 ’80년 바덴바덴 총회에서의 쾌거가 아닌 ’74년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제41회 국제사격연맹총회에서 78년 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 개최권을 따낸 일이다.
그때 이미 우리나라는 서울 올림픽 유치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포석을 깔고 있었다. 서울 올림픽의 개최는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의 치적이지만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치밀하게 준비되고 계획한 일이다. 만약에 ’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한국에서 유치하지 못했다면 서울 올림픽 개최의 꿈은 수십 년 후로 미뤄졌을지도 모른다.
한국은 제41회 국제사격연맹 총회에서 기적적으로 세계 체육계 실력자 중의 하나인 멕시코 마리오 바스케즈 라냐(Mario Vasquz Rana)와 겨루어 62:40으로 누르고 개최권을 가져왔다. 영국의 체육전문 대(大) 기자인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는 그의 저서 “올림픽 혁명(Olympic revolution)”에 “세계사격선수권대회의 한국 유치는 아시아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바꾸었다”고 까지 표현했다.
개인적으로도 이 유치권 획득은, ’80년 바덴바덴 총회의 서울 올림픽 개최권 유치, 그리고 야구, 배드민턴, 소프트볼, 태권도, 탁구, 테니스 등 당시 비올림픽 종목이었던 종목을 중심으로 진행한 제1회 산타클라라 월드게임(World Game) 창설 시 내가 창설회장으로 활역하는 데 밑거름이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1974년 제41회 국제사격연맹 총회가 열릴 당시 나는 KOC 부위원장과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세계태권도연맹은 바로 전 해인 1973년에 창설되었다. 사격과는 관계가 없었는데 당시 대한사격연맹 회장은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었다. 그때 박종규 회장은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때문에 청와대 경호실장을 그만두고 근신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던 박종규 회장은 내게 총회에 대신 참석해 줄 것을 부탁했다. 나도 유치에 자신은 없었지만 가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당시 김택수 체육회장은 회의적이었다.
서재관 부회장, 협회 사무국장, 박갑철(조선), 이석형(동아) 기자, 정진우 영화감독, 신용석 특파원, 오전식 전 경향신문 정치부장이 나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박종규 회장은 사격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사격에 많은 투자를 했다. 세계적인 수준의 태릉사격장도 건설했고 국제사격연맹회장을 비롯한 임원들도 초대해서 로비를 했으며 내가 대회장을 맡았던 국제친선사격대회도 치렀다. 또 정부 차관급 이상이 참가하는 사격대회도 열었다.
당시의 한국의 정세는 학생데모가 많았으며 경제도 개발도상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또한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남북이 나눠져 있었으며 대만 문제도 세계적인 이슈가 되어 있었다. 김택수 당시 대한체육회장도 나와 함께 NOC 회의에 가도 발언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훈령이 와 함구해야 할 때였다. 1975년 로마(Rome)에서 킬라닌(Killanin) IOC 위원장이 주재한 IOC-NOC 총회가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다.
여하튼 ’74년 국제사격연맹 총회는 스위스 베른의 IPU(만국우편연합) 회의실에서 열렸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는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아시아에서는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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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년 스위스 베른의 세계사격연맹총회에서 / 오른쪽부터 신용석 파리 특파원, 필자, 오전식 경향신문 정치부장, 박갑철 조선일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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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총회.
프레젠테이션에서 멕시코 사격연맹회장 겸 NOC위원장인 마리오 바스케즈 라냐는 “멕시코는 팬암 게임, 올림픽 게임을 치러 대회 운영능력이 검증돼 있고 경제도 훌륭하며 재정적으로도 충분하다. 하루 숙식비도 10불이면 충분하다.”고 놀랄만한 제안을 했다. 나도 처음에는 9불 정도 제안하려다 이기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라냐의 설명 후 “우리나라는 5불이면 된다.”고 했다. 일단 전략에서 앞서자는 생각이었다. 어느 나라 돈이냐는 질문이 나오자 나는 “멕시코도 미국 달러로 10불, 한국도 미국 달러로 5불”이라고 차이를 강조했다.
마리오 바스케즈 라냐는 스페인어로 나는 영어로 설명했는데 아무리 통역이 있어도 영어가 유리할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상황이 열세인 우리에게 또 하나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북한이었다. 북한 대표들은 우리가 배포한 자료들을 보지도 않고 내 책상위에 쌓아 놓고 있었다. 내 제안 설명이 끝난 후에도 대사관 직원으로 보이는 북한 측의 한 인사가 불어로 반대 연설을 했다. 총회장 여기저기서 정치발언은 하지 말라고 지적이 일었다.
곧 의장석에서 질문이 있었다. “태릉의 사격장이 뮌헨(Mȕnchen) 식이냐, 비스바덴(Wisbaden) 식이냐?”는 물음이었다. 사격에 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대한사격연맹 부회장에게 물어보았는데 모르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그전 세계대회가 비스바덴에서 열렸기에 “비스바덴 식입니다.”라고 답했다. 재차 질문은 한국에서는 무슨 음식을 제공할 것이냐고 물어 한, 중, 일, 양식 다 있다고 답했다. 그만큼 한국은 안 알려져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점심 식사를 했는데 오후 투표를 생각하니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속이 탔다. 투표 후 곧바로 이어진 개표. 손에 땀이 났다.
의장의 개표 결과 발표는 62:40, 한국의 승리였다. 즉시 박종규 회장에게 승전보를 전했다. 박종규 회장은 놀라더니 “그래요. 술 많이 드시고 오세요.”하면서 너무 좋아했다. 그리고 한국 대사관(대사 이동원)에서도 몰려왔다.
북한대표들은 정진우 감독이 사진을 찍어대자 밖에 나가서 죽인다고 협박을 해서 정 감독이 피신하는 일도 발생했다. 당시만 해도 남북대결이 첨예하고 독침 예기도 많이 있을 때였다. 박종규 회장은 비록 소련과 동구권은 불참한 반쪽 대회지만 ’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어느 대회 못지않게 훌륭하게 치러냈다. 세계사격선수권대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종목 세계대회로 기록된다. 이 때 선수촌으로 지은 것이 워커힐 아파트였고, 국고보조가 10억이었다. 대한체육회 1년 예산이 1억일 때니 놀랄 액수였다.
78년 대회는 가난하고 데모는 끊이질 않고 남북이 대립되어 있는 초라한 한국에 대한 세계 체육계의 인식변화를 가져오게 한 대회였다.
성공 대회로 자신감을 얻은 박종규 회장은 박 대통령에게 올림픽을 건의했다. 박 대통령도 올림픽 개최에 상당한 관심을 표했고 검토를 지시했다. 문교부도 구체적인 검토를 위해 국민체육심의회의를 두 번이나 열었는데 나도 위원으로 참석해 의견을 개진했다. 심의회의는 최규하 총리(두번째는 남덕우 총리), 박찬현 문교부 장관, 서울시장, 박종규 체육회장, 김택수 IOC 위원, 김운용 WTF 총재로 구성되었다.
회의 참석자들 가운데는 아직 올림픽 개최는 시기상조가 아니냐, 몬트리올 올림픽처럼 경제난을 가중시킬 염려가 있다는 등 부정적 의견 일색이었다. 김택수 IOC위원도 자기 1표밖에 안 나올 거라며 비관적이었고, 박종규 회장 혼자만 올림픽 개최를 강변하는 상황이었다. 결국은 박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올림픽 유치 건은 사라지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