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대회 때 이야기다. 일본은 가라테 15체급을 아시아 경기대회의 종목에 채택하고 태권도를 제외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KOC)는 속수무책이었고 대한태권도협회와 아시아태권도연맹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다. 태권도가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이어 히로시마 아시아대회에서도 정식 종목에서 빠진다면 태권도의 올림픽 종목 채택을 향한 실적이 우습게 될 판이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메달 경쟁을 하기 위해서 그들이 종주국인 가라테를 메달 부분에서 15체급이나 밀어 넣고, 태권도는 의도적으로 제외한 것 같다. 또 일본의 태권도는 미미한 존재였다.
더구나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은 중국의 전통 무술인 우슈가 한발 앞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대회였다. 우슈는 6개나 되는 체급을 정식 종목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상황이라서 태권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가능성은 없었다.
일본은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한국에 패배를 한 직후였고, 월드컵 유치에 있어서도 필사적이어서 아시아 경기대회만이라도 한국을 제치고 중국에 이어 종합 2위를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태권도를 정식 종목으로 넣어달라고 나중에 요청을 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억지였다.
나는 우선 중국으로 가서 허진량(Zenliang He) 중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베이징이 2000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내가 측면에서 지원을 해준 인물이기에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태권도가 정식 종목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요청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중국은 일본이 좋다고 한다면 반대하지 않기로 약속을 해주었다. 국제스포츠외교는 주고 받는 관계(Give and Take)다.
다음에 나는 일본으로 갔다. 키시 체육회관에서 후루하시 일본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겸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대회 조직위원장을 만났다. 그리고 츠츠미 요시아키 일본 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오기무라 세계탁구회장도 만났다. 오기무라 회장이 경기조직을 총괄하고 있었다. 나가노 동계올림픽 유치 때 내가 결정적인 가교 역할을 해준 일이 있었기에 더욱 부탁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정말로 잘 부탁 드립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끝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국제사회에서는 실질적인 대안이 없어서는 안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고받는’ 것이고, 그 약속을 필히 지킬 수 있는 신용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태권도를 8체급만으로 하는 안을 내놓았고 더욱이 한국은 4체급에서만 선수를 출장시키거나 또는 체급을 4개로 줄이고 비용은 한국이 부담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나의 제안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내가 내건 여러 가지 안은 교섭용이었다.
일본에 체재하고 있던 중에는 한일협력위원회 의원들에게도 면담을 신청하였다. 나는 카토 무츠키, 오치 미치오, 하라다 켄 씨등 핵심적 의원들도 만나서 협력을 구하였다. 귀국 후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회장인 쿠웨이트의 세이크 아메드(Ahmed) 씨가 서울을 방문하였다. 나는 그를 국기원에 초청하여 태권도 시범을 보여주는 등 정성껏 접대를 하였다.
|
|
| ▲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 아메드 OCA 의장과 함께 |
|
그의 부친은 쿠웨이트 국왕의 동생으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당시 사망한 사람이다. 그는 부친에 대한 흠모의 정이 대단히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국기원을 방문하여 아시아경기대회 때 촬영된 부친의 건강한 모습을 사진으로도 보고 비디오를 통해서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비록 사진과 비디오지만 돌아가신 선친과 오랜만에 대면하는 그런 경우가 되었다.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침공으로 많은 자료들을 소실하게 되었고, 한동안 혼란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에 그 감격은 아마도 남달랐을 것이다. 그 후에 쿠웨이트의 박물관을 위해 사료를 많이 보내주었다.
아메드 씨의 감동적인 국기원 방문은 결과적으로 우리들을 크게 도와주는 결과가 되었다. 아메드 씨가 우리나라를 떠나고 난 며칠 후, 히로시마에서 열린 OCA 총회에서 아메드 의장의 강력한 지지와 일본의 협력에 의해 태권도는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대회의 정식 종목으로 전 체급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아마드 회장의 인연은 ’95년 부산아시안게임(2002) 유치로 이어진다.
미국 뉴욕에 있는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93년 제11회 세계태권도대회도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매디슨 스퀘어가든은 어지간한 경기를 하기 위하여 임대를 할 수 있는 그런 조그만 장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용료가 굉장히 비싸기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Union)의 힘이 엄청나게 강하고 모든 것이 돈으로 통한다. 시상대를 이용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얼마, 경비 시간이 1시간 연장되면 추가 비용이 얼마, 하는 식으로 뭐든지 조금만 움직이는 데도 조금씩 경비가 계산되어 청구될 정도로 미세한 부분까지 비즈니스화 된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그런 힘든 장소에서 태권도 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것이다. 그 이유는 미국의 중심인 뉴욕에서 더구나 스포츠 이벤트의 메카가 불리는 장소에서 세계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함으로써 세계적인 스포츠로서의 지위와 위상을 높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ABC 방송과 협상을 하여 30만 달러의 제작비를 우리 연맹이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경기를 생중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미국인의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채널 수가 많은 미국에서 시청률 16%를 마크하여 미국인이 좋아하는 골프와 테니스 프로그램을 능가하였다. 태권도가 미국에서 대중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것이 입증된 사례였다.
또한 나는 많은 IOC 위원들과 IOC 체육 국장들을 초청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태권도에 대해서 별다른 지식이 없었지만 경기를 보고 나서는 모두가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참가국 수, 태권도가 보여주는 활발함, 경쾌한 발차기, 그리고 질서 있는 경기 운영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강가(Gangga), 로드리가즈(Rodrigaz), 샌탠더(Santander), 콜마네로(Colmanero), 후바(Huba) 그리고 애틀랜타 조직위원장 빌 페인(Bill Payne), 미국 올림픽위원장, IOC 스포츠국장 펠리(Felli) 등이 참석해주었다. 매디슨스퀘어가든 세계대회 때, 박연이, 박연환, 김정훈, 그리고 미국 내 태권도사범들의 노고와 협조는 잊을 수가 없다.
모든 움직임이 멈춰 있고 얼핏 보기에는 마치 정지된 것 같으면서도 한순간 돌연히 전혀 각도가 없을 것 같은 형태에서 발차기가 나와 상대를 매트에 쓰러뜨리는 스포츠인 태권도,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0.1초 사이에 기술이 걸려 경기가 끝나고 마는 스포츠인 태권도가 관중의 뜨거운 시선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펠리 체육국장의 태권도에 대한인식도 달라진 것 같았다.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서 채택되기까지에는 이와 같은 숨 쉴 틈조차 없이 우리의 스포츠 외교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걸어온 숨겨진 노력의 결과다. 올림픽으로 가는 과정에 정부 지원이나 기업의 지원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