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0년 5월, 대학 1년을 마치고는 2학년에 올라가 제2회 행정고시 3부(외교관 시험) 준비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에는 1학년을 마치면 본고시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기에 입학 후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에는 학기가 9월에서 4월로 이행하는 중간단계로 6월에 1학기가 시작었되기 때문에 5월 말에 2학년 진급 자격을 얻어 8월에 시험을 볼 예정이었다.
나는 다른 고시 준비생들처럼 밤을 새워 국제법, 헌법, 행정법, 외교사를 암기했다. 영어과목은 신경을 안 썼다. 식사와 화장실에 가는 시간 이외에는 책과 씨름을 하면서 실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6월 20일 종로 세무서에서 2,000원 인지를 구입한 후,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모퉁이에 있던 고시위원회에 가서 서류를 제출했다. 8월 3일에는 시험장에 모여서 4일부터 12일까지 시험을 볼 예정이었다. 그러나 고시 응시 접수 5일 만에 외무고시를 보려던 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남쪽을 향해서 진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외교관 시험은 커녕, 국가의 존립이 위험에 직면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진격하는 중에 6월 27일 학교는 노천극장에서 김윤경 총장서리가 휴교를 선언했다. 그때까지 나는 서울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6월 27일이 학생들의 임시 소집일이었고, 방안에서 고시 준비에 전념을 하고 있었기에 외부의 사정에 어두웠다.
이미 인민군은 서울 북부인 미아리, 창동, 수색 등에까지 침입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절박한 사태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전혀 심각하게 파악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사람들은 서울을 사수할 것이라고 믿었고,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휴교령이 내려진 직후 바로 대구 출신 변웅원과 서울역으로 갔다. 어머니가 있는 대구로 달려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원에게 물어보니 서울역으로부터 발차하는 열차는 이제 없다고 하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친구 변웅원(연대 야구선수, 작고)과 함께 그의 집이 있던 명륜동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기차는 몇 시간 뒤에 서울을 떠났다고 한다. 아마 그것이 마지막 남행 열차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전쟁이 발발하자 매일같이 나를 만나기 위하여 대구역 앞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리셨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열차를 놓친 후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어머니를 만나 뵙지 못했다.
그날 밤 인민군이 서울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28일 새벽까지 포격이 있었고 주위를 살피면서 밖에 나가 보니 거리에는 한국군 병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우리는 집에 갇혀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틀 후 인민군은 혜화동 여자의과대학병원에 있는 부상자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에 진주했다.
인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걸어 다녔다. 그들은 하늘을 향하여 다발총을 발사하는 등 위협행위를 계속하고 다녔다. 친구와 나는 총성에 놀라 화장실 창문으로 고개를 들어 밖을 주시해 보았다. 인민군이 도로 양측을 2개조로 나뉘어 행진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친구는 개를 끌고 밖에 나갔지만, 나는 그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인민군 1개 소대가 착검을 하고 들이닥쳤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천장과 가구, 이불 등에 마구 칼을 쑤셔댔다. 그리고 총을 쏜 놈이 누구인가? 무기는 어디에 숨겼는가 하면서 눈을 벌겋게 뜨고 소리쳤다. 친구의 어머니는 울며불며 왜 이런 짓들을 하느냐고 항의를 하였다.
아래층에서 소란을 피운 후 그들은 내가 있는 2층으로 올라왔다. 내 멱살을 잡고 무기를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 순간 정말로 죽었구나 생각했다. 바로 그때 밖에 나갔던 변웅원(연대 상과2학년)이 붙들려 들어왔다.
어깨에 별을 두 개 단 장교가 권총을 뽑아들고 베란다로 나오라고 명령했지만 나는 방에서 나가지 않은 채 아무것도 모른다고 항변했다. 만약 베란다로 나가면 총에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때 대구 출신 서울대 법대 한태원이란 학생이 다니러 왔다. 그는 서울법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혁신적인 좌익운동 학생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돌아오자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사정을 듣고 그가 설명을 하였는데 지금까지 듣지도 못한 용어들뿐이었다. 혁명이라느니, ORG라느니, 조직 책임자라는 둥의 말들을 하면서 그는 설명을 했다. 그의 설명을 듣고 인민군은 태도가 조금 누그러진 듯 보였다. 잠시 후 그들은 우리를 감시할 병사 2~3명을 집에 남기고 모두가 빠져나갔다.
그러나 해가 진 후, 다시 한 번 나타나 가족 전원을 끌어내 보위부라고 하는 안호상 씨 댁으로 끌고 갔다. 한밤중에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우리는 순순히 끌려갔다. 보위부 장교가 우리를 조사했다. 그러나 특별한 혐의가 없자 오해 받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훈계하고 2주간 연금하겠다는 조건으로 풀어 주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생각을 해보니 인민군이 근처 학교 앞을 행군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창문을 열고 본 것을 발포했다고 오해를 한 것이다. 아무튼 1주일 이상 보초가 친구 집에 와 있었다.
일주일 후 나는 더 이상 친구 집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서울 남부에 있는 과천 이모집으로 피난을 했다. 전쟁이 치열해지자 젊은이들을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징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과천은 노량진이나 말죽거리에서 10원을 내고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