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초의 시련은 한국전쟁이 일어나 외교관 시험 준비가 무산된 일이었다.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에 빠져 있을 때 나의 꿈이 깨지는 것 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군에 입대해 국가를 위해 싸웠다.
두 번째는 외교관으로서 길을 걸으며 대통령 경호실에서 보좌관(차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때 일어났다. 꿈과 적성과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더구나 그 시기에 사랑하는 어머님을 여의고 말았다. 그러나 1971년부터는 태권도의 국기화, 세계화에 전념해 결실과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시련이 다가왔다. 1980년에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사회정화를 명목으로 거센 태풍이 불어 닥쳤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이후 군사정권은 사회를 안정시킨다는 구실로 권력 장악을 했다. 사회정화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폭력배를 비롯하여 범죄단체와 불량배 등을 일정 기간 국가에서 관리하고 정화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사회정화의 태풍은 갑자기 태권도계까지 불어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태권도는 난립하고 있던 각 문파가 국기원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세계연맹도 창설하여 국제적으로 안정적인 발전을 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군사정권 측은 누구의 소행인지는 모르지만 태권도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고 연행하면서 탄압하려고 했다.
그 중에는 나를 미워하는 인간들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태권도협회장에 취임한 이후 태권도가 국기로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자 내심 불안하고 질투심에 타오르던 인간, 또는 협회장에 욕심을 내고 있던 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맞섰다면 오늘날의 태권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 중 권력 최고 핵심자의 인척 중 한 사람은 태권도협회장직을 뺏고 싶어 하며, 자신의 욕망을 의도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해외의 사범 5-6명에게 투서를 쓰게 하기도 했다.
당국에서는 나를 비롯하여 태권도 관장들에게 전원 사표를 내라고 압력을 가했다. 사표를 제출할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당시의 군사정권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철권을 실시하던 때였다.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탱크로 진압할 정도로 무서운 집단들이었기에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몰랐던 게 당시의 상황이었다. 모두가 사표를 내고 내사도 받았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가 무슨 폭력집단입니까? 국가를 위해서 태권도 발전을 위해서 지금까지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 왔는데 정부는 왜 이제 와서 우리를 탄압하는 것입니까?”
한밤중에 내 집에 전화를 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관장들도 많이 있었다. 나도 역시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정권이 바뀌면 정계의 인사이동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정치색도 경제적인 이권도 전혀 없고, 단지 명예직뿐인 태권도협회장직(職)조차 빼앗으려고 하는데 그저 한심한 마음뿐이었다. 그렇다고 억울하고 분하다고 정면으로 싸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정치적인 큰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유명한 정치가들도 일제히 희생당하는 상황 하에서 태권도협회 하나 정도 없애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이제야 겨우 태권도협회도 여기까지 성장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협회장직을 수락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난제들을 해결하면서 태권도의 국기화(國技化)에 성공했다. 또 세계연맹을 만들었고, 세계대회를 개최하기까지 발전시켜 왔던 터였다.
하지만 이까짓 협회장 자리나 탐을 내고, 이권이 있다 싶으면 뭐든지 가리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지금까지 쌓아 올려 온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 더 이상 직함에 연연하지 않고, 많은 직함을 갖는 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와 관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조용히 다른 일을 찾아야겠다 싶기도 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당국에 의한 내부 조사가 끝나자 나의 사표는 반려되었다. 적발될 만한 아무런 잘못이 없었기에 당연한 결과라 여겼다. 하지만 협회의 많은 임원들은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사범들은 당국에 의한 감시가 강화되어서 도장도 자유롭게 운영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으로 내가 지금 여기에서 모든 것을 집어 던져 버린다면, 지금까지 쏟아 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 명백했다. 또 여기서 내가 몸을 뺀다면 갈 곳을 잃은 태권도 관장들을 다시 살려낼 방법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이 자리를 굳게 지키기로 했다. 조용히 은연자중하면서 내일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사실 그 당시에는 정상적인 업무를 한다는 것도 무리였고, 하소연 할 곳도 별로 없었다. 더구나 내가 다른 일을 한다면 ‘변절자’라는 오명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로지 와신상담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와 협회 임원들 그리고 태권도 임원들은 지금까지 10년간 오로지 태권도 발전만을 위해서 활동해 온 것이지 개인적인 축재이나 명예가 탐이 나서 열심히 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조사를 받아 보아도 부정이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때가 되면 모든 것이 필히 밝혀질 것이라 생각하고 조용히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
그 당시에는 정말로 운동도 열심히 했다. 하루에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를 달릴 정도의 운동량이었다. 내가 다니던 헬스클럽에서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마치 마라톤 선수로 생각할 정도였다. 아니면 나이 많은 선수나 코치로 여겼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동병상련이라고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자리를 잃은 어려운 사범들을 돕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얼마간의 돈이 생기면 그것으로 그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어 주었다. 큰 도움이 되지 않았겠지만 그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마워했다.
조금씩 시간이 흐르자 당국의 태도도 상당히 많이 누그러졌다. 더욱이 우리를 내사해도 아무런 잘못이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국가를 위해서 쌓은 공적만이 드러날 뿐이니 더 이상 문제될 일이 없었다. 더구나 나의 국제적인 지위를 참작해서 더 이상의 문제로 삼지 않았다. 그리고 1981년 내가 올림픽 유치에 많은 공헌을 한 것 등이 참작되고, 이규호 문교부장관에 건의해서 임원들을 다시 복귀시킬 수가 있게 되었다.
그 당시 어려움을 함께 한 사람들은 지금도 나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로 남아 있다. 그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서울올림픽 성공과 시드니, 아테네 올림픽의 태권도 정식 종목 채택은 거의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면서 곤란에 직면해 있을 때 친구와 동지가 필요하다. 함께 울어 주고, 함께 고민하고, 난국을 헤쳐 나가면서 노력해 주는 친구와 동지가 소중한 것이다. 무엇이든 모든 짐을 혼자서 지겠다고 하는 독립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서 서로가 협력해 가는 시대이기에 그런 사고방식은 더욱 더 고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인내와 끈기를 갖고 참을성 있게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도 키울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와신상담이라는 말처럼 장래를 위해 앞으로 나갈 때와 후퇴할 때를 기다리며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점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