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지의 1994. 6.에 발간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1회 동문 수상집의 이름이다. 학(鶴)은 서울대학교를 상징하는 새이고, 지(志)는 11회의 마음을 모은다는 것으로, 학같이 고고한 선비의 지조를 뜻한다는 것이다. 거 참 이름 한번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장병규(張炳圭)가 쓴 글에 의하여 대학교수동기들의 모임에서 만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것이 1993, 11, 13.인데, 그 기회에 몇 자 생각나는 대로 써 본 것이 그만 개업인사가 되고 말았다.
「계유년(癸酉年)을 보내는 우리 동기 송년(送年)의 밤 행사에서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 가운데는 나하고 최재호(崔在護)가 법조공무원직에서 제일 마지막까지 남았다는 것, 따라서 판사, 검사직에 종사하는 동기가 이제는 아무도 없다는 것 그런 말이 나오고, 그러면 변호사를 제일 먼저 한 친구가 누구냐, 김동환(金東煥), 이세중(李世中)의 순서다. 하는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그 모임에서 오랜 법관생활을 흠 없이 해주어 수고가 많았다는 사회자 이대순(李大淳)의 소개에 이어 친구들의 다정한 박수를 받았다.
나는 이제 변호사가 되었다. 대법원장이 임기를 많이 남겨둔 채 공직자 재산공개 파문으로 물러가고, 아래 서열의 대법원장이 임명됨에 따라 홀홀 법원을 떠나버렸는데, 아무 대비 없이 옷을 벗은지라 당장은 저 많은 책을 어디에다 갖다 놓을 것인가 하는 것부터 걱정이었다. 시간이 되면 자동차가 대기하고 신문이 놓인 책상에 앉으면 차가 나오고, 그것뿐, 예정된 일들을 챙긴 뒤 가득 밀린 기록(期錄)을 대하는 일과 속에 파묻혔던 몸이 하루아침에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편했다. 느긋하게 아이들 방에 꽂힌 책들을 읽었다. 실직(失職)을 해도 변호사 개업을 언제든지 할 수 있는 나 같은 처지는 얼마나 행복한가. 집에 틀어박혀 노는 동안 일찍 직장을 잃은 사람들의 답답함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무실을 어디에다가 어떻게 열 것인가 하는 본격적인 중압이 마음을 여러 갈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래 쉬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지 아니했다.
법관직을 그만둔 다음 우리의 주식(主食)이라 할 수 있는 판례와 그 평석(評釋)들을 읽으면서 지난날의 것과는 다른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어쩐지 나는 그동안 제대로의 학문을 멀리하고 있었던 것 같고, 나도 모르게 판결서 작성의 기능공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대법원에 와서는 제법 완숙한 기술자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판결서의 작성이라는 부담에 시달린 나머지 기록에 파묻혀 나는 그 동안 참된 지식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판결서(判決書)를 만들기 위하여, 그 본분을 다하기 위하여 판례를 읽었고, 논문을 읽었고, 법률서적을 읽었다. 그 목적을 이루었다면 또 다른 판결서를 만들어야 하고 그를 위해 오직 그 목적을 위한 테두리 내에서 공부를 한 것이다. 그랬다. 나는 한없이 바빴지만 결국 다른 면에서 나태(懶怠)했던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바로 그날, 신문은 살인범 누명을 쓴 경찰관의 이야기를 보도하고 있었다. 현직 경찰관이 살인범으로 구속 기소되어 1·2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으나, 유력한 용의자가 붙잡혀 상고심선고를 앞두고 풀려나게 됐다는 이야기다. 김 순경이 검찰에 와서, 경찰서에서 자백하면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다고 협박과 회유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범행을 부인했으나 그대로 기소되었고, 법원도 유죄 쪽으로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순간,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이라도 되었더라면 어찌 될 뻔했는가. 마치 내가 주심(主審)인 것처럼 아찔했다. 변호사로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아니한 주제에 이러쿵저러쿵 아는 체하기가 뭣하지만 개업초기부터 상고이유서를 써 달라는 주문이 대부분이었는데, 수임(受任)한 사건 가운데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패소한 당사자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대법관으로 있으면서 하급심판결의 오류를 많이 시정하였지만, 변호사로서 억울한 당사자를 직접 대면하고 위임당사자의 이익 쪽으로, 기록을 다소 편향적인 시선에서 본 탓도 없지 않았을망정 어찌 이 따위 재판을 할 수 있는가, 당사자 앞에서는 표정을 감출 수밖에 없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조용히 울화가 치미는 사건도 있었다. 아무리 호소해도 최종심(最終審)에서 들어주지 아니하면 그만인 것, 이런 생각에 미치면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백 건 천 건의 재판을 잘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한 건의 오판을 가지고 나 같은 사람까지 흥분하지 않는가. 판사(判事)란 정말 어려운 직책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순간순간 지나온 최종심의 법관 생활을 회고하면서 행여 그런 오판을 보아 넘긴 일은 없었을까. 거꾸로 잘된 재판을 뒤엎어 당사자의 가슴에 멍을 들게 한 적은 없었을까. 내가 그런 엄청난 일을 삼십 수년 간 맡아 왔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