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환갑은 1994년 9월이었다. 그리고 나는 대법관으로서 6년 임기가 끝나는 1994년 7월에 법관복(法官服)을 벗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대법관 재직 중에 환갑을 맞기는 틀린 일이었고 결국 두 달이 모자라 기념 회중시계(懷中時計)를 갖지는 못하게 될 것이었다.
당시 동료 대법관들이 환갑을 맞는 대법관에게 기념으로 회중시계를 선물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대법관을 지낸 선배들이 가끔 바지춤에서 계란 같은 둥그런 시계를 꺼내 열어 보면서 환갑기념 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나도 저런 시계를 하나 얻어 보았으면 했는데 따지고 보니 환갑이전에 대법원을 떠나게 되어 있는데다가 임기조차 채우지 못하고 퇴직하게 되었으니 회중시계와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퇴임기념 선물로 은 쟁반을 받았다. 거기에는 「大法官 朴禹東 在職記念(대법원 박우동 재직기념) 1986. 4. 17―1993. 10. 3」 이라고 되어 있고 그 아래 대법원장을 비롯한 12명의 대법관 이름이 적혀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나의 환갑은 과분하게도 기념논문집을, 그것도 많은 법조계인사의 하객들 앞에서 아내와 함께 봉정(奉呈)받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때 논문집 같은 선물은 기대하지 아니했고, 다만 대법관직을 물러나고 환갑을 지내게 될 때 바로 법관생활을 회고하는 책을 쓰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게 작심한 이후로 틈틈이 몇 자씩 적어 본다든가 자료가 될 만한 것을 챙긴다든가 해보았는데, 우선 재판업무에 바빠서 느긋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고, 또 쓸 만한 자료를 준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세울 만한 책을 만들 자신이 없었다.
그런 회의감으로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어 변호사가 되었던 것이다. 변호사 사무실을 열기까지는 하는 일은 없어도 정신적으로는 온갖 상념으로 분주했다. 책을 읽다가도 불쑥불쑥 앞으로 변호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맑지 아니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참으로 싫었다.
그래서 일을 벌였다. 노트에 펜을 갖다 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몇 백부 정도 찍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돌리고 그저 우리집의 소중한 기록으로 보존했으면 하는 것이 희망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도 금방 알게 되었다. 하여간 큰 목적도 없이 부담도 없이 마음대로 글을 쓰니 편하고 즐거웠다. 다만 기분 상한 이야기도 쓰고 잘못을 저지른 이야기도 써야 하는데 그때마다 남의 명예를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제약이 작용되어 주춤할 때가 더러 있었던 것이 유감이었다. 이렇게 해서 「판사실에서 법정까지」는 1995년 1월 한국사법행정학회에 의하여 출간되었던 것이다.
책이 출간되고 큰 책방 몇 개 말고는 서점에 책이 깔리기도 전인데 신문에 광고성 기사가 실렸다. 1. 29.자 동아일보의 ‘책과 함께’라는 고정란에 나의 살짝 웃는 사진과 함께 「33년 판사생활 고뇌와 애환의 기록」이란 제목으로 책을 소개하는 기사가 게재된 것이다. 그 며칠 전 문화부 이철희(李哲熙) 기자가 찾아와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책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었더니 출판사로부터 한 권을 입수하여 대충 읽었다고 말했다.
내용이 법조계의 이야기, 재판이야기인데다가 법률전문 용어가 많이 나와 일반인들로서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신문에 광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데 제 발로 기자가 찾아왔으니 이상하다 싶은 생각부터 먼저 났던 것이다. 혹시 이채주(李採柱) 주필이 보내서 오신 것 아니냐고 슬쩍 물었더니 싱긋 웃기만 했다. 언론계의 친구로서 김성우(金聖佑) 한국일보 주필과 친지인 한국방송공사의 이수익(李秀翼) 주간, 이 세 사람은 내가 책을 쓰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고 수시로 관심을 기울여 주었기 때문에 출간되자마자 보내 주었던 것이다.
동아일보의 보도에 자극을 받았는지 며칠 뒤 문화일보의 공영운(孔泳云) 기자, 한국일보의 이희정(李熙晶) 기자, 서울신문의 노주석(魯柱碩) 기자, 조선일보의 최홍열(崔洪烈) 기자, 세계일보의 조용호(曺龍鎬) 기자, 한겨레신문의 안영진 기자가 잇따라 인터뷰를 하고 일부 내용과 함께 책을 소개해 주었고, 주간한국, 월간중앙도 사진과 함께 나의 근황을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KBS 제1라디오의 「박찬숙정보센터」에서 20분간, MBC 라디오의 「김한길과 함께」에서 30분간 생방송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나는 갑자기 매스컴을 타는 명사(名士)가 되고 있었다. 예기치 아니했는지라 약간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출판사는 출판사대로 책을 구하는 전화가 많았다 한다.
질문은 대개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하여 묻고 들어갔다. 조선일보에는 “대법관 임기만료 1년을 앞두고 사법연수원에서 고등법원 판사들에게 제 경험을 얘기한 것이 회고록을 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1992년 어느 날 사법연수원장(司法硏修院長)으로부터 고법판사 연수프로그램의 초청연사로 지명되어 아무 이야기나 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나는 나 자신이 고법판사였던 시절 즉, 1970년도 초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기로 하고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한 시간을 채웠다. 나중에 녹음테이프를 선물로 받았다.
대법관 임기가 끝나 법복을 벗을 날이 다가온다 싶으니까 지난날의 법관생활을 정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틈틈이 일지 형식의 기록을 꺼내어 메모를 보충하기도 했다. 법복을 벗고 나와 가까운 후배판사들에게 나의 구상을 이야기했더니 법조계는 훌륭한 인물이 많은데도 그들의 체험을 기록한 책이 너무 없다면서 이제부터라도 선배들의 귀중한 경험을 말로만 전해주는 풍토를 고쳐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