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목은 원래 예정에 없었는데 책을 내기 직전 우연히 한마디 할 기회를 얻게 된 것같이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한승헌(韓勝憲) 변호사의 「역사의 길목에서」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그와 나눈 대화 때문이다.
나도 칠순을 바라보는 날에 이 책을 내기로 되에 있었기 때문에 책이 되면 어떤 범위에서 증정을 하느냐 하는 것이 은근히 걱정이 되어 슬쩍 떠보았다. 대답은 의외로 명쾌하고 단호했다. 극히 제한된 범위의 몇 사람 외에는 주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작심을 하게 된 데는 내 탓도 있었음을 덧붙였다. 3년 전 한 변호사는 비슷한 종류의 칼럼집을 낸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법조계의 많은 지인(知人)에게 증정하도록 종용했다는 것이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안 주고 하는 말을 듣는 것도 그렇고 해서 상당히 광범위한 증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받고 인사를 하는 사람이 몇 손가락에도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도대체 고맙게 받았는지, 부쳐 오니까 받아 책장에 꽂아 두었는지, 서문(序文)정도라도 읽었는지 아무런 대꾸가 없더라는 것이다. 책뚜껑을 열면 저자의 정중한 서명(署名)이 있는데 그런 책을 받아 놓고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누가 다시 책을 보내고 싶겠는가. 저자의 심정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 없었다.
2003. 5. 중순 디지털 조선일보 칼럼에 실린 이상운 소설가의 「내가 책을 보내지 않는 이유」라는 흥미 있는 제목의 글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책을 보내는 작자의 마음 씀씀이와 책을 받는 사람들의 가지가지 형태의 반응을 쓰고 있다. 책이 나오면 사람들에게 이런 작품을 썼으니 한 번 읽어보세요 하고 보냈는데, 메아리 듣기는 왜 그리 힘든 것인지 평소 가까이 지내는 몇몇 사람으로부터 격려를 곁들여서 보내준 책 잘 받았다는 엽서가 오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어서 평균적으로 책이 거둬들인 메아리는 2% 아래였다는 것이고, 이해 타산적으로 보자면 정말 수지 안 맞는 장사를 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나는 책을 보내는 것은 인사를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사는 주고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책을 받고서도 아무 말이 없는 것은,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인사를 받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과 같다.
남이 인사를 해오거나 책을 보내오면 절대로 반응을 보이지 말아야 하는 괴이한 사유가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그런 괴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있다고 해도 대한민국 국민 중에 고작 한 두 명일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듯한 이 불량 매너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학자들이 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전문적인 탐구는 그들에게 맡기고 내가 감으로 포착한 한 가지를 말하자면, 그것은 권위주의이다. 친구와 선후배를 제외하면, 내가 책을 보낸 사람들은 대체로 나보다 경력과 능력이 뛰어난 대단히 ‘훌륭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초짜 소설가에 지나지 않는 자에게 ‘책 잘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팔리지 않으면 국가적 수치입니다.’ 따위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잘 관찰해 보라. 권위의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인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사란 타인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에, 인사를 받을 줄만 알고 할 줄은 모른다. 그래서 무례인 줄도 모르고 당당하게 무례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참으로 슬픈 풍경이다. 마치 목에 철근이 박힌 것처럼 도무지 남에게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이 작가는 「이제 나는 거의 책을 보내지 않는다. 더 이상은 그들이 불량 매너와 권위의식을 즐기게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다짐하게 되었던 것이다.
5, 6년 전쯤, 언론계이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던 친구와 법조계의 실상을 이야기하다가 고위 법관들조차 일에 파묻혀 제대로 교양서적을 읽을 기회가 적다고 걱정하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는 자네가 써서 한때 장안의 종이 값을 올린 문학예술의 문집을 법관에게도 선물하면 좋아할 거라고 흔들었다. 글쎄 출판사에 알아봐야겠는데 하고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응낙하는 것이었다.
하기야 그가 고위법관들에게 그런 책을 증정할 아무 연고도 없었고, 오직 법조계의 친구하나 때문에 귀찮은 일을 벌려야 했던 것이다. 그는 한 질 세 권이나 되는 저서를 구해서는(출판사로부터 매수) 내가 가르쳐 준 수증자 성명을 일일이 쓰고 서명을 한 다음 나의 사무실 주소를 보내는 곳으로 하여 발송했다. 거기에는 나의 주선으로 책을 보낸다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어 나도 생색을 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몇 해 후 그 친구에게 말을 꺼내 보았다. 혹시 책을 받고 인사답신을 해 온 분이 있더냐고. 대답인즉슨 모르는 사이이므로 인사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한 분이 고맙다고 전화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그 분은 나에게도 귀한 책을 얻어주게 해서 고맙다고 말했다. 김용준(金容俊) 대법관이었다. 나의 보잘것없는 회고에세이집을 받고서도 단숨에 읽었다고 말해주던 분이다.
내가 한 변호사더러 좀 더 많은 분에게 책을 증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앞에 말한 나의 저서는 극히 제한된 범위 다시 말하자면, 회갑기념논문집의 집필자를 비롯하여 일부 법조인에게만 증정했는데, 그러고 보니 뒷날 자주 만나는 사람까지도 서점에서 구입한 것을 알게 되어 너무 송구스럽게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증정 대상의 범위를 확장하여 왜 나는 빼나 하는 원망을 듣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랬지만 그것은 현명한 방책이 아니었다. 아는 사람의 책은 당연히 공짜로 얻는다는 심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좀 문제다. 그러니까 얻었으면 반응을 보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잘 알고 지내는 사람에게 책을 전하고 싶어도 자기 자랑 같아 머쓱한 생각도 들고, 출판기념회 같은 행사를 하면 초대 그 자체로서 일일이 증정이라는 수고를 생략할 수 있지만 그건 더 과시하는 꼴이 되고 비용도 많이 들어 벌이기 힘든 일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을 초청하고 봉투와 축하화환을 접수하고 유명인사의 축사를 끼워 넣는 요란한 출판기념회는 대개 출마를 예정하고 있는 국회의원 후보들의 행사다. 그러나 법조인들의 경우는 기념논문집은 몰라도 개인저작물의 출판기념회 같은 것은 여간해서 열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전히 증정이라는 고민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책을 받고 인사를 않는데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 스스로 책을 받고 인사를 하지 아니한 적이 몇 차례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선물 받고 시치미를 떼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다. 어찌 연하장(年賀狀)을 받은 것처럼 팽개칠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기쁘게 받았는데 그 성의를 잊을 것인가. 그러니 고맙다는 뜻을 전하지 못한 것은 실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선의(善意)의 가벼운 실수일 것이다. 어느 기회에 인사를 하거나 어떤 방법으로 빚을 갚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넘기고 마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책을 증정받고 고마워하면서도 즉시 인사를 하지 아니한 분들은 이에 동감(同感)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사가 없다고 너무 섭섭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그래도 만일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면 그것은 책을 돌린 저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앞의 소설가는 증정받을 사람을 잘못 선택한 실수를 저질렀음이 틀림없다. 인사를 기대하고 책을 증정하는 것처럼 되어서는 그것은 저자의 실수라고 해야 한다.
책을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것 보다 먼 뒷날이라도 그 책의 내용을 들먹이면서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더 고마운 것이다. 물론 책을 받고 인사하고 책을 읽고 또 인사하는 것이 백 점짜리 매너일 것이지만 바쁜 세상에 오십 점짜리라도 따는 습성을 길렀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