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사무실의 간판을 걸 일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쯤 어떤 건물에서 한 칸 방을 빌려 누구를 사무장으로 하고 그런 준비를 시작하여야 할 때인데, 두문불출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고 있으려니 날이 갈수록 좀 초조해지면서도 될 대로 되어라 마음이 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의 간섭도 없는 그 누구에게의 부담도 없는 그런 자유의 시간은 그리 오래 갈 수 없었다. 주변에서 궁금해 하는 전화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나의 안일과 평온은 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변호사가 되어야 했고 구체적으로 틀을 짜야 했다. 그런데 홀로 사무실을 개설하기가 싫었다. 주된 일이 상고사건의 처리일 터이고 그 일이면 혼자서 감당할 성질의 것이므로 단독으로 개업하는 편이 능률적이고 경제적인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스타일의 변호사로서 세월을 보내기가 싫었다.
서초동 법원주위의 시장상가처럼 형성되어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하는 일도 마음에 들지 아니했고 일일이 법정에 드나드는 일도 내키지 아니했다. 이런 뜻을 비추어 슬쩍 의견을 구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지 못마땅한 눈치였다. 멋대로 하면서 고집을 꺾을 위인이 아니니 내버려둘 수밖에 없지만 돈 좀 만져보기는 틀렸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후배들과 함께 합동사무소(合同事務所) 또는 법무법인(法務法人)을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럴 때 나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는 듯이 몇 군데의 합동법률사무실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서 사무실개설을 주저하는 것도 별로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어떤 변호사로부터 사건처리를 맡아 달라는 전화가 집으로 오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결단을 내려버렸다. 김찬진(金贊鎭) 변호사가 운영하고 있는 동서종합(東西綜合)법률사무소를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그 소문을 들은 법조인들 중 나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인연으로 거기에 갔는지 의아해하고 개인사무실을 차리지 않는데 대하여 아쉬워했다. 그러나 나는 좋은 후배들과 어울려 사건처리를 하고 나의 모자라는 점에 관하여 배우면서 「장래의 안정」을 택하고 싶은 욕심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1986년 11월에 설립된 동서종합은 국내 일곱 번째의 로펌(lawfirm)으로서 매년 몇 명씩 식구를 불려가는 순항이 계속되고 고객도 꾸준히 늘어갔는데, 대표가 정치권에 발을 담그면서부터 서서히 퇴락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1993년 11월 나를 맞이하여 조그만 활력소가 되기는 하였지만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리는 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뒷날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법무법인 광장을 소개하면서 「사건과 고객을 통한 성장 못지않게 사무실의 맨파워도 갈수록 막강해졌다. 특히 동서가 주목을 받은 것은 1993년 11월 박우동 전대법관(63)을 영입하면서부터. 지금은 로펌마다 대법관이나 부장판사 이상을 지낸 전직 법원의 간부들이 으레 한두 명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때만 해도 동서의 박 전대법관 영입은 단연 업계의 화제였다」고 썼다.
이듬해인 1994년 1월 법무법인 동서종합법률사무소가 되어 새 단장을 하고 의욕적으로 재출범을 했지만 경영상태가 호전되어 가지 아니한 것 같았고, 변호사들도 직원들도 즐거운 분위기에서 일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 형편에서 나 자신의 희생으로 법인에게 주는 이익과 법인으로부터 받는 보답과의 균형이 일그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의 장래에 대하여 불안과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애당초 잘못 판단했던 것일까. 그리하여 나의 마음은 점점 흐르는 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 동서에는 2명의 미국변호사(이기창:李基昌, 서혜석:徐惠錫)를 비롯하여 15명가량의 변호사(백윤재:白允才, 이상기:李炁相, 제강호:諸康鎬, 김형진:金炯辰, 임성우:林成雨, 남성두:南聲斗, 김성용:金性龍, 이준성:李濬成 등)가 포진하고 있었다. 모두가 유능한 인재들이었다. 김찬진 변호사의 인물스카우트 솜씨는 물론 그의 일에 대한 재능과 추진력 여기 알아줄 만했다. 그런데 운이 따라주지 않는 정치에 대한 미련을 일찌감치 거두었더라면 동서도 상당히 발전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 처음 들어왔던 자세 그대로 열성적으로 일에 파묻히다가도 어느 순간에 가서는 빨리 이 법인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울러 그 후의 거취(去就)에 대하여 구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가장 마음에 부담을 주는 것이 후배 구성원들을 두고 떠나는 일이었다. 젊은 변호사들을 팽개치고 홀로 난파선에서 헤엄쳐 가는 보기 거북한 모습, 그래도 많은 변호사들은 나의 처지를 이해해 줄 것 같았지만 겉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들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변호사는 업무자체가 낱낱이 공개하면서 결제를 받는 형식이 아니기 때문에 홀로 쓰는 방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밖에서는 모른다. 몇 변호사를 고용하고 있는 법률사무소에서 경영이 어렵다는 눈치가 보이거나 책임자와의 불화나 심각한 마찰이 생기거나 하면 은밀하게 자기 갈 길을 탐색하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담당 사건에 대한 인계인수가 끝나기 바쁘게 송별연도 없이 떠나버리는 쌀쌀한 장면도 없지 않다.
대형 로펌의 경우는 전문분야별 팀조직으로 운영되는데 그 팀장을 에워싼 구성원들 간의 의리와 우정은 남 다른 데가 있다. 로펌의 운영을 책임지는 시니어 변호사들은 각 팀들끼리의 경쟁을 유도하면서 그 친목을 견지하는데도 신경을 쓰게 된다. 만일 어느 팀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거나 사전에 불을 끄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그것은 어느 날 사무실에 팀 단위의 내분이 일어나는 것이 되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맞게 되는 것이다. 변호사는 고도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이런 일은 별로 생기지 않는다.
나의 마음은 그렇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탈퇴는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는 법무법인을 해체해 버리는 의도처럼 비춰질 것이다. 경영진에서도 극력 반대했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어떤 면으로서든지 그 파장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숙고를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어느 날 국무총리를 그만두고 다시 친정으로 돌아와 변호사간판을 달 수밖에 없는 이회창(李會昌) 동기를 만나 오성환(吳成煥) 변호사와 함께 저녁을 하면서 사무실을 내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변호사업은 다시 시작해야겠는데 법원이 있는 서초동 쪽보다 집이 가까운 강북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이 변호사는 1994년 9월부터 약 8개월 동안 교보빌딩의 우리 사무실 한쪽을 쓰면서 법인의 고문형식으로 단독 개업을 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