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2월 어느 날, 나의 사무실에 예고도 없이 시골사람 모습이 완연한 50대 부부가 찾아왔다. 남자는 얼굴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얽어 겉으로 보기 흉한 모습이지만 공손하기 이를 데 없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질기 그지없는 위인임을 알 수 있었다. 부인은 남편이 운영하고 있는 주유소 옆에서 조그마한 식당을 하고 있다면서 “변호사님, 제발 저희 좀 살펴주시와요.”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눈물을 찔끔찔끔 했다.가만히 보니 부인은 남편이 이야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말을 가로막고 자기가 대신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부인 자신도 제대로 말을 조리있게 잇지 못하게 되니까 남편을 돌아보며 “여보, 이야기 좀 해 봐요. 글쎄”하면서 다시 남편의 구원을 청하고 그리고 또 옆구리를 찌르면서 말을 가로채곤 했다.
무슨 사건인지 판결이나 한번 봅시다 하고 그들이 내민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忠州支院)의 제1심판결을 보니 남자가 운영하고 있는 주유소에 대한 소유권다툼인데, 찾아 온 남자가 원고이고 그의 형이 피고로 되어 있다. 부친이 물려준 부동산에 대하여 형이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했는데 동생이 명의신탁(名義信託) 해지를 원인으로 하여 소유권이전등기절차의 이행을 구하는 소송이었다. 원고가 패소하자 대전고등법원에 항소(抗訴)를 해 놓고 나를 찾아 온 것이다.
변호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고 일간신문에 광고도 내지 아니하여 좀체로 시골에서의 사건위임(事件委任)이 없는데다가, 상고사건도 아닌 대전의 항소사건을 맡아 달라니 이상해서 어떻게 나를 찾아오게 되었는가 어느 분이 소개했는가를 물어보게 되었다.
그들 부부는 주저주저하면서 “변호사님 충주에 사는 박희성이란 분 아시는지요.”하고 되묻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사람이 기억에 없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했더니, 부부가 서로 마주 보다가 “그 분은 변호사님을 잘 아시던데요.”했다. 그렇다면 혹시 아는 사람이 아닐까. 나의 고향에서 그곳으로 이주한 사람은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꼬투리가 잡히지 아니했다.
“잘 모르겠는데‥‥‥. 도대체 그분은 뭘 하는 사람인데요.”
“별로 하는 것 없어요, 농사짓지요.”
“나를 어떻게 안다고 합디까?”
“오래 전부터 어르신과 친형처럼 지내는 사이라고 해 왔어요, 우리 시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대법원에 계실 때 그 사람은 누구한테든지 변호사님 어른을 들먹이며 다녔답니다.”
“별일도 다 있네,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그러면 그 사람의 말을 믿고 있었단 말입니까?”
“어르신 정말 그 사람을 전혀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모릅니다. 그건 그렇고 이 사건과 그 사람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 사건 소송을 일으킨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우리 형제간의 분쟁을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저더러 소송을 하면 이긴다고 부추겼어요. 가만히 있는 저에게 자꾸 소송을 하라고 했어요. 대법원에 계시는 형님께 물어 봤다고 했습니다. 틀림없이 이긴다고 했으니까 소송을 제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말을 듣고 소송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예. 그 사람이 변호사를 선임했어요. 우리는 충주의 소송을 맡은 변호사를 한 번 밖에 본 일이 없답니다.”
“변호사비용도 그 사람에게 주었다는 말입니까?”
“예.”
단단히 믿고 있었던 소송의 결과가 패소(敗訴)로 나오니까 부부는 너무도 당황했다. 형의 명의로 된 주유소를 그냥 그대로 경영하고 있는 것만 못한 지경이 되었다. 이제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꼴이 되었으니 큰일났다는 것이었다. 판결문을 보면 이 남자는 초등학교 중퇴이고 피고인 형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위험물취급기능사 자격까지 취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나의 동생이라는 사람 지금도 거기에 살고 있습니까?”
“어데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고소를 당해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핑계로 사기를 쳤다 그 말입니까.”
“예, 경찰에서 수사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도 당신들은 그 사람 말을 믿습니까?”
“‥‥‥‥‥.”
“나는 고향이 경남이고 충주라는 데에는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 없습니다. 그곳에 살아 본 적도 없고 근무한 적도 없어요. 어리석은 사람들아.”
“변호사님 매우 송구스럽습니다만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어 보세요.”
“강릉에 부동산을 산 일이‥‥‥‥.”
“강릉에?”
“‥‥‥경포대에, ‥‥호텔부지를‥‥.”
“그런 것 몰라요, 왜 그래요.”
그들 부부는 무엇인가 확신을 했다는 듯이 서로 마주보고 고개를 끄떡 끄떡 하더니 “아닙니다, 아닙니다요.”하고 더 말을 잇지 아니했다. 그리고서는 항소사건을 제발 좀 맡아 달라고 졸랐다. 일주일 쯤 뒤에 한 번 더 와 보시라고 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들 부부가 다시 사무실로 왔다. 나는 그들의 양해를 얻어 대전의 변호사를 소개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궁금한 사연을 다시 물었더니 처음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박희성이란 사람은 나의 가족관계까지 소상히 아는 것처럼 꾸며 댄 모양이었다. 심지어 딸은 곱추로, 미국에서 수술을 받은 일까지 있다는 등 촌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하여 제법 비밀스러운 이야기인양 드러내기도 했다.
“대법원까지 따라 가 본 일이 있습니다요. 우리는 정문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제 혼자 대법관 어르신네를 만나러 들어갔다 오더니 지금 청와대에 들어가서 안 계신다고 했답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끝도 없이 전개된다.
이 사건을 제소(提訴)하고 얼마 후 내가 대법관직을 그만 둔 그 무렵 이 사건 원고는 아마 나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 박희성을 졸랐던 것 같다. 결국 그 사람을 따라 서울에 왔는데 나의 집이 광화문근처의 삼층집이라 하여 비오는 밤에 광화문 어느 지역을 맴돌다가 집을 찾지 못하고 내려간 일도 있다 한다. 그 뿐인가. 알아 본 바 내가 철원 근방의 절에서 쉬고 있다하여 그 일대에서 장교생활을 하여 산골지리가 훤한 처남을 대동하고 여러 곳의 절을 돌아다니며 나를 찾았다 한다. 헛걸음을 한 뒤에는 내가 제주도에서 쉬고 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여보슈, 강릉인가 경포댄가 부동산은 또 뭐요.”하고 물었더니 그것도 실토했다. 사실은 영감님께서 경포대에 호텔을 짓기 위해 몰래 땅을 사 둔 것이 있는데, 그 토지가 형식상 자기명의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호텔이 들어서는 날 뭔가 이권(利權)을 내비친 것이 아닌가 싶고, 그리고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하여 현장을 가보자고 했던 것 같고, 그래서 그들은 경포대에 가서 진짜 호텔건축예정지라고 쓰인 푯말을 보았다 한다. 어느 날은 내가 그 현장에 오기로 되어 있고, 대관령에서 만나기로 했다면서 그의 딸 등 가족까지 대동하고 나섰다 한다. 그의 가족도 큰아버지를 처음 대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허사. 어디엔가 전화를 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오던 도중에 자동차사고가 나서 원주의 병원에 실려갔다고 엄청난 거짓말을 둘러댔다는 것이었다.
“그것까지도 믿었단 말입니까.”
“아암요, 어찌 안 믿습니까.”
사무실을 물러나면서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명함크기의 쪽지를 멋쩍은 듯이 내 보였다. 나의 사진이 든 프로필을 복사한 것이었다. 좀 젊었을 적의 사진이었지만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사진 속의 인물과 분명히 동일인(同一人)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듯이 남자는 어리숭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