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4월 어느 날, 어떤 변호사의 소개로 서류를 한보풍이 들고 온 의뢰인(依賴人)을 만났다. 형사 상고사건이었는데 꼭 이기게 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변호사를 찾아 온 의뢰인으로부터 종종 듣는 소리지만 몇 가지 서류를 토대로 사건의 내용을 듣고 보니 보통 이상한 사건이 아니었다.
변호인으로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는 판결내용정도 읽어 본 상태에서 당사자로부터 자초지종 생생한 경과를 듣고 그때그때 메모를 하면서 의문점을 풀어 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당사자는 민사이건 형사이건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이야기하고 불리한 사실은 되도록 감추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이 사건에서도 경험한 사실을 자세히 말하게 하고 열심히 들었지만 참으로 해괴(駭怪)한 사건으로서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도시 갈피를 못 잡을 정도로 문제가 이리 저리 꼬여 있었다. 제1심판결과 제2심판결의 결론이 상반되는 것도 나름대로 이해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의뢰인의 이야기는 조금도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고 점점 신뢰와 확신을 가지게 되면서 정의감에서라도 이 사건의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소심판결을 뒤집는 작업에 착수했다.
피고인이 된 사건의 피해자 갑 할머니는 무고죄(誣告罪)로 기소될 당시 70세. 형제들과 공동으로 서울 중심지에 나대지(羅垈地)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1987. 12. 22. 갑의 여동생인 을이 대리인의 자격으로 병 아무개 남자와의 사이에 임대기간 3년, 보증금 3천5백만 원, 월 임료 백만 원의 임대차계약을 체결했다.
병남은 그 대지 위에 150평 규모의 단층음식점 건물을 지어 영업하기로 한 것이었다. 건물 평수를 명시한 것은 갑 할머니가 대구에서 경영하는 회사의 거래은행에 위 대지가 담보로 설정되어 있어 150평을 초과하는 호화음식점 건물일 경우 호화사치업소 대출규제조치에 따라 기존 대출금을 회수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의 계약은 3년 후 건축물을 철거하여 원상회복하기로 하고 건축허가명의를 갑 할머니로 했다. 임대보증금과 월 임료는 당시의 적정 가액의 10분의 1 및 2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나대지 상태로 두는 경우 토지초과이득세 등 세금부담문제도 있고, 계약기간 종료 후에는 그 건물을 부수고 그 자리에 고층건물을 짓기로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부터 하나하나 일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병남은 임대인 몰래 그의 막도장을 만들어 여러 차례 설계변경을 하면서 건축허가면적의 두 배를 훨씬 초과하여 무단 증축을 하고 있었다. 구청으로부터 시정지시를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아니하여 결국 경찰에 고발당하기에 이르렀는데, 정작 피고발인인 갑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무렵 어느 날 갑 할머니가 사업관계로 출국하기 위하여 절차를 밟을 때 건축법위반으로 고발된 장애사유가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갑 할머니의 항의를 받은 병남은 건축법위반 문제도 해결하고 밀린 달세도 지급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집을 방문한 을 여인에게 달세를 지급하기는커녕 천연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오히려 겁을 주었다. 자기는 검찰에 불려가서 호되게 당하여 병원신세까지 졌다는 것, 그리고 갑은 지명수배되어 있으니 아예 비행기 탈 생각도 말라는 것, 뿐만 아니라 식당 건물을 짓다가 인부 하나가 맨홀에 빠져 죽은 사고가 나서 자기가 유족들에게 배상금을 물어주었지만, 그들이 건축주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난리를 칠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그래 놓고 자기는 법대를 중퇴하여 검사 친구가 많으므로 실제로 건물을 지은 자기의 처 정 여인이 모든 책임을 지도록 하겠으니 확인증서 한 장만 써주면 그걸 가지고 자기가 모든 책임을 지고 빨리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1989. 2. 1.자의 이 확인증서는 병남이 부르는 대로 겁에 질린 을 여인이 받아 쓴 것인데, 본인은 건축법위반이나 공사도중의 인명사고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모든 책임은 실제 건축을 한 정 여인이 진다는 요지의 내용이다. 누가 보아도 갑 할머니에게 불리한 문서로는 보이지 아니하지만 자기 스스로 건축한 것이 아니므로 건축법위반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니, 병남의 처가 썼으면 몰라도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러나 잠시 감상해 보자. 당시 병남으로서는 갑 할머니 명의의 문서를 위조하기 위하여 용의주도하게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을 여인은 언니보다 몇 살 적었지만 대학원을 나온 지식인인데 얼마나 위협을 받았으면, 얼마나 다급했으면 서둘러 부르는 대로 받아쓰고 고분고분 지장까지 찍었겠는가. 여기서 갑 할머니 자매는 단단히 물렸고, 의식이 없는 사이에 독(毒)은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서명글씨와 인장, 무인,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적(敵)에게 간단히 암호문서를 건네고 만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병남이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을 짓고 다른 사람에게 식당과 목욕탕으로 전대(轉貸)하여 수억의 보증금과 수천만 원의 월세를 받고 있었던 것도 뒤에 안 사실이지만, 임대인에게는 3개월 치 월세를 낸 이후로는 한 푼도 송금이 없었다.
어느 날 식당을 경영하기 위하여 병남과 계약을 체결한 사람으로부터 괴이한 문의가 들어왔다. 병남과 10년 기간의 임대차계약을 체결한 것이 맞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이야기냐, 3년의 임대계약을 맺은 것이라고 했더니 분명히 10년 계약서를 보여 주어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뭔가 일이 크게 꼬이고 있다.
병남은 태연하게 새로운 계약의 체결사실을 주장하면서 1988. 2. 1.자 임대차계약서를 제시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갑 할머니의 자필 서명과 인장이 정확하게 찍혀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 인장은 한 눈에 틀림없어 보이는데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정신을 차려 자세히 살펴보니 보증금과 월세는 종전과 같고 대지사용기간은 10년(120개월)으로 하되 처음 체결한 임대계약서는 무효로 한다고 되어 있었다. 나중에 검찰에서 병남은 건축허가를 받을 당시 이미 임대인으로부터 받아 놓은 것이라고 하면서 몇 가지 문서를 제시했는데, 무슨 용도로 쓸 참이었는지 비슷한 내용의 대지사용승낙서, 대지사용계약서가 조잡한 글씨로 만들어져 있는가 하면, 심지어 도장사용승낙서라는 것과 이행각서라는 것도 있는데 후자는 건물 준공 후 등기를 병남의 처 이름으로 해 준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앞에서 말한 확인증서 외에는 어느 것이나 병남의 자필로서 갑 할머니의 서명, 도장이 찍혀있거나, 을 여인의 무인이 갖추어져 있다. 도장, 서명 같은 것은 소름이 끼치도록 비슷한데 내용을 자세히 보면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허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