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5. 8. 갑 할머니는 서울지방검찰청에 병남을 사문서위조 등으로 고소했다. 피해자로서는 확신을 가지고 한 행위였지만 상대를 모르고 별로 준비 없이 서둔 것이 불찰이었을까. 수사기관에서 적절히 밝혀 낼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은 것이 오산이었을까. 과연 병남은 보통의 인간이 아니었다. 절도죄, 배임죄, 사기죄, 폭력범죄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전과(前科)외에도 벌금형, 기소중지, 혐의 없음의 처분을 합치면 무려 20차례가 넘게 경찰, 검찰, 법원을 드나든 기록이 나타났다. 특히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은 범죄 가운데는 사기, 사문서위조 등의 사건이 포함되어 있어 이 사건이 결코 가볍게 넘어가지 않겠구나 하는 우려를 갖게 했다.
건축법위반으로 고발되어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외 무단증축을 했으며 준공검사 이전에 입주했는가 하고 물으니까 병남은 처음에는 시공회사에서 한 일이라 자기는 잘 모르고 있었다고 잡아떼다가, 끝에 가서는 사회 경험이 적어서 그런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라고 금방 자세를 바꾸는 연기를 능갈치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랬다. 병남은 반격(反擊)을 개시했다. 그 해 10. 29. 고소인이 거꾸로 고소를 당한 것이다.
많은 형사사건의 고소인, 피고소인으로 단련된 그에게 갑 할머니 자매와 같은 사람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대질신문 같은 장면에서는 고소인이 오히려 그로기(groggy:권투에서 쓰는 용어로 심한 타격을 받아 몸이 휘청거리는 즉, 몸을 가누지 못하는 위기 상태)상태에 빠질 정도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는 병남의 손을 들어주었다. 인장이건 무인이건 진짜와 다르다고 볼 수 없고 따라서 위조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위조가 아닌데 위조라고 우기면서 수사기관에 허위의 사실을 신고했으니 이건 무고(誣告)다. 검찰은 병남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 해 12. 7. 전후곡절을 따지지 않고 고소인을 구속했다. 그리고 서울지방검찰청 구 아무개 검사는 그 해 12. 21. 갑 할머니를 기소(起訴)함과 동시에 병남에 대해서는 혐의 없음의 처분을 내렸다. 할머니는 보석으로 풀려나기까지 석 달 넘게 엄동설한의 감방에서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은 1992. 2. 11.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無罪:90고단9617)를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1994. 2. 2. 검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제1심판결을 파기하고 피고인에 대하여 징역 6월(미결구금일수 95일 산입) 1년간 집행유예(92노5441)를 선고했다.
이리하여 사건은 최종심에서 가리게 된 것이다. 과학적인 결론은 유죄 족으로 기울고 말았고 상식과 경험칙(經驗則)으로는 무죄가 틀림없는 사건인데, 상고심(上告審)의 서류재판에서 법관들을 어떻게 설득시켜 원심의 유죄판결을 뒤엎을 것인가 두려운 마음으로 상고이유서의 작성에 매달렸다.
서류의 위조 여부에 관하여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소:國立科學搜査硏究所)가 문제의 서류는 가짜가 아니라고 판별했음에도 제1심은 그 감정결과를 물리치고 무죄라는 어려운 결말을 이끌어 내었고, 항소심이 이를 번복하여 검사의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했지만, 유죄판결은 결국 감정(鑑定)의 결과라는 벽을 넘지 못한데 기인한 것이었다. 앞에서 간단히 병남이 인영(印影:도장을 찍은 흔적)과 서명, 무인을 위조했다고 말했지만 그 과정과 내용이 너무 복잡하고 하급심판결의 이유도 길기 때문에 여기서 소개를 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만 이야기하면 제1심은 필적(筆跡)과 무인(拇印:엄지손가락 지장)의 동일성에 관하여 감정결과회보와 감정인의 진술에는 피고인의 필적과 무인이 감정물에 나타나 있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지만, 그 필적들이 타인에 의하여 위조된 것인지 여부에 관한 진술이 없으므로 감정결과만 가지고 피고인이 그 증거물들을 작성한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는 취지였고, 항소심은 필적과 무인이 동일하다는 감정의견에는 이미 그것이 본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지 타인에 의해 위조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당연히 내포되어 있다고 했다.
어쨌거나 상고이유(上告理由)의 방향은 감정결과의 당부에 관하여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기로 했다. 험담을 쏟아내 본들 오히려 밑질 것 같은 위험이 있고, 그것을 도외시하더라도 병남이 위조한 문서들이라는 심증(心證)을 굳힐 공격자료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문서에 찍힌 인영이나 무인의 동일성은 일단 시인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병남에 의하여 교묘하게 날조된 것이며, 국과수의 과학적 기능조차 투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능적이고 교활한 수법에 의하여 위조된 것임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1992. 2. 16자 중앙일보는 「지문, 인장 어떻게 위조(僞造)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는데 그 요점만 인용해보면 이렇다.
「필적이나 지문, 인장이 어떻게 얼마나 감쪽같이 위조될 수 있을까. 진본과 다름없는 위조가 가능하다면 누구든 자신도 모르게 금품, 재산관련 거래서류가 자기명의로 꾸며져 엉뚱한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자칫 엄청난 혼란과 분쟁을 야기할 수 있는 위조의 과정과 실물모사 정도 등을 알아본다.
일본에서 최근 수입된 ‘수지(樹脂) 인쇄지’를 통해 실물대로 복제가 가능하다. 이 인쇄기의 원래 용도는 손으로 쓴 명함이나 사인‧로고‧문양 등 각종 디자인을 원본대로 대량 복제 인쇄하기 위한 것.
위조하려는 무인이나 인장을 실물 크기로 찍은 뒤 필름을 감광(感光)수지에 완전히 진공 밀착시키는 것으로 작업이 시작된다. 수지의 두께는 1㎜로 특수화학 처리된 수용성 소재, 밀착된 필름과 수지에 2분 내지 3분간 자외선을 쐰 뒤 분리한다. 분리된 수지를 물에 씻으면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필름을 통해 자외선을 쐰 지문이나 도장의 글씨부분만 남고 나머지는 표면이 녹아 지문‧인장‧서명 등이 양각(陽刻)된 복제물이 된다. 그 표면에 인주나 스탬프 등을 묻혀 찍으면 실제의 무인‧날인이 얼마든지 똑같이 재생되는 것. 특정인의 엄지손가락 지문이나 도장을 마음대로 소유하게 되는 셈이다.
소요시간은 20분 내지 30분으로 현재 서울시내만도 70여 곳의 인쇄소가 이 인쇄기를 갖추고 있다. 복제가격은 개당 1천2백 원(도장) 내지 3천 원(디자인) 선」.
「이상으로 피고인의 결백이 증명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원심판결은 한마디로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의 감정결과에 집착한 나머지 오직 그 점만을 절대불가침의 영역으로 전제 삼아 논리를 전개한 것이 역연합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우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피고인이 제시한 각종 증빙자료와 피고인과 그 가족의 진술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감정결과에 저촉되어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병남이나 그의 가족의 진술만이 옳다는 식으로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적반하장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로 인하여 범죄자는 남의 재산을 가로채어 부당이득을 얻으면서 백주에 활보하고 있고, 그를 응징하고자 한 사람은 거꾸로 곤욕을 치르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공소사실에 기재된 피고인의 고소내용은 진실과 조금도 배치됨이 없으며, 따라서 피고인의 소위가 무고일 수 없습니다. 원심판결은 현저하게 증거판단을 그르쳐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원심판결의 위법을 대법원에서 바로 잡아 주지 아니하면 이 사회의 정의는 세울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