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나오지 아니했지만 마무리 쟁송을 서둘 필요가 있었다. 병남으로부터 다시 빌려 건물에서 음식점, 목욕탕 등 영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병남이 소송에서 완패(完敗)한 사실을 안다. 그래서 언젠가는 법률상의 주인에게 건물을 비워주어야 할 처지임을 잘 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병남에게 지급한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할 일이 난감하다. 사람을 찾을 방법도 없거니와 그 명의의 재산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 병남에게 속은 줄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락호락 집을 비워주고 빈손으로 물러날 줄 리가 없다.
병남은 갑 할머니로부터 보증금 35,000,000원, 월 1,000,000원에 빌린 대지‧건물을, 한 사람에게는 보증금 250,00,000원, 월 3,000,000원으로, 다른 한 사람에게는 보증금 370,000,000원, 월 4,000,000원, 그 밖에 또 다른 세 사람에게 보증금 60,000,000원, 월 2,000,000원 등 이와 비슷한 금액으로 전대(轉貸)하고 있었다. 병남이 민사재판에서 졌고 건물을 명도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소문을 들은 이들이 병남을 만나 보증금의 반환을 요구했더니 걱정 말라 앞으로 10년은 더 버틸 수 있다고 장담하더라나. 그리고 얼마 후에는 그 가족과 더불어 주민등록만 남긴 채 모두 행방이 묘연한 상태.
갑 할머니로서는 마지막단계로 점유자(占有者)들을 상대로 건물명도를 구하는 소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고 7명에 대한 건물명도청구는 2000. 3. 29. 서울지방법원(99가합97549)에서 건물이 원고의 소유로 추정된다는 것과 피고들의 점유할 권원(權原)에 관한 주장, 입증이 없다는 이유로 간단히 결론이 났다. 그런데 피고들 가운데 두 사람은 종전의 여러 가지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완강히 버티었다. 서울고등법원은 2000. 11. 8. 피고들의 항소를 기각하는 판결(2000나18679)을 선고했다.
이제부터 애써 획득한 재판의 실현 장면을 구경해 보자. 법이 선언한대로 이긴 쪽이 건물을 회수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싶지만 채무자가 집행을 방해하는 방도를 연출하면 그것도 거추장스러운 정도를 넘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주게 된다.
우리는 항소심판결이 선고되는 즉시 제1심판결의 가집행선고(假執行宣告)에 의하여 건물명도의 강제집행(强制執行)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서로에게 득이 될 것이므로 판결 선고직후 적당한 선에서 피고들의 자진 명도의향을 타진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무리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어서 순순히 들어주기가 어려웠다. 집행에 들어가면 사람도 기물도 당장 바깥으로 내쫓기고 말 터인데 뭘 믿고 배짱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집행을 저지하는 방법을 꿰뚫고 있었다.
당장 문제는 항소심판결의 정본(正本)을 원고의 소송대리인은 2000. 11. 20. 송달 받았는데 피고들에 대한 송달(送達)이 순조롭지 아니한 것부터 시작했다. 강제집행은 판결이 이미 송달되었거나 동시에 송달한 때에만 개시되는데(구 민사소송법 제490조 제1항, 민사집행법 제39조 제1항), 피고들의 변호사가 판결선고 바로 전날인 11. 7. 법원에 사임신고를 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피고들의 주소로 판결을 송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예상한 대로 그곳에 거주하지 아니하여 반송한다는 것이었다. 피고 한 사람에 대해서는 수취를 회피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우편집배원이 아닌 집행관(執行官)에 의한 특별송달의 방법을 써서 송달했고, 다른 한 사람에 대한 송달은 법원의 직권에 의한 공시송달(公示送達)에 의하여 송달을 했는데, 이것은 2주일이 경과하여야 효력이 생기도록 되어 있어 송달이 끝난 것은 2000. 12. 15.이었다.
그 동안 강제집행의 준비를 진행하면서 기다릴 도리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피고들이 거주하고 있던 장소에 다른 사람이 영업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집행 당사자가 틀려 바로 집행을 할 수 없게 된다. 피고들에 대해서는 1999. 11. 9. 부동산점유이전금지가처분의 결정(서울지방법원 99카합3012)을 받아 집행을 완료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승계집행문(承繼執行文)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하여 공시송달의 효력이 발생하던 날 승계인에 대한 집행문을 받아 2000. 12. 28. 집행관 일행은 드디어 강제집행의 현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피고들은 그 사이에 또 다른 사람에게 점포를 임대하고 있었다. 새 주인이란 사람은 집행관에게 당당히 전날에 작성된 임대차계약서, 사업자등록증, 영업신고증 등을 제시하고 있었다. 합법적 수단을 써서 집행을 피하는 모양새이지만 그 이면에는 법의 가면을 쓴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강제집행을 받을 우려가 있는 상태에서 강제집행을 면할 목적으로 재산을 허위 양도한 행위는 강제집행면탈죄가 된다」는 판례(1971. 4. 20. 선고 71도319 판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들은 형법 제327조의 죄를 범한 것이었다. 이런 웃을 수도 없는 행태를 보면서 집행관일행은 주춤했다. 그리고 집행은 (법대로) 거부되었다. 그러니까 또 한 번 승계집행문을 받지 아니하면 집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 한 번 더 승계집행문의 부여를 신청하는 것은 좋은데, 그 집행문이 부여되는 데는 재판장의 명령이 있어야 하고, 필요할 때에는 명령에 앞서 채무자를 심문(審問)할 수 있게 되어 있어(구 민사소송법 제482조, 민사집행법 제32조), 잘못하면 그 사이에 사람이 또 바뀌어 농락당하는 일이 생길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날 집행관이 집행현장을 철수하기에 앞서 점유자들에게 자진 퇴거해 줄 것을 종용하자 피고 두 사람과 새 점유자는 기꺼이 확인증 하나를 썼다. 위 건물 내에 있는 모든 유체동산(有體動産)을 2001. 1. 10.까지 이의 없이 자진 철거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막 단계가 아닌가 한 번 더 속아보자, 그런 기분으로 강제집행의 속행을 주춤하고 있는 사이에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12. 28. 그날 오후 피고들은 상고장(上告狀)과 상고장접수증명을 첨부한 강제집행정지(强制執行停止)를 신청하는 서류를 제출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2001. 1. 2. 출근하여 비로소 정보를 듣게 되었다. 이게 아닌데, 고등법원에서 집행정지의 결정이 되는 날이면 상고심판결이 날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할 판이다. 정지신청사건을 담당하는 재판부에 정지불가의 몇 자 의견서를 제출해 보기라도 할 생각으로 있는데, 직원이 전하는 말인즉 금방 정지결정이 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결정(2000카909)을 보니 고등법원장을 직전에 그만 둔 변호사가 피고들의 대리인으로 되어 있었고 담보로 공탁된 돈은 겨우 30,000,000원이었다.
대법원은 2001. 5. 9. (2001다6039) 상고심절차에관한특례법 제4조의 심리불속행(審理不續行)을 이유로 피고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얼마 뒤 피고들은 원고로부터 이사비용을 받고 건물을 비워주었다. 임대차계약이 체결된 날로부터 13년 반 만에 주인에게 돌아온 것이다.
변호사로서 사건 처리를 하다가 보면 이렇게 별 희한한 일을 다 경험한다. 민사사건에서는 세상에 저런 종자도 있나 할 정도로 막가는 악질 사기성 인간을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과 어쩌다 계약을 하여 인연을 맺게 된 사람은 그때부터 교묘한 농간에 말려들면서 슬슬 파멸의 구덩이로 빠져들게 된다. 그런 일에 관여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변호사도 재수가 없으면 그 과정에서 상대방으로부터 온갖 모함을 당하기도 한다.
이 사건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병남으로부터 건물을 전차(轉借)하여 영업을 하고 있던 사람이 지독하게 불리한 제소전화해(提訴前和解)에 의하여 병남에게 엄청난 임대료 등을 뜯길 대로 뜯기고 빈손으로 쫓겨나게 되면서 찾아왔다. 이 문제도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병남이 전대한 건물에 대하여 임대차 등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 없음이 확인되었으므로 그 화해조서에 기한 명도집행은 허용될 수 없다는 취지에서 청구에 관한 이의의 소(민사소송법 제505조, 민사집행법 제44조)를 제기하고, 아울러 2천만 원의 보증공탁을 조건으로 한 강제집행정지결정을 받아 내기에 이르렀다. 전차인이 그 공탁금을 우리 사무소에 전달하면서 노트에 다른 여러 지출항목과 함께 변호사 아무개라고 이름을 적고 2천만 원이라고 써 놓았다. 병남이 명도집행을 강행하는 와중에 그 노트를 입수하게 되고 그 내용을 훑어보다가 2천만 원이 변호사에게 전달된 점을 주목하고 그 돈은 어딘가에 교제자금으로 쓰기 위해 수수된 것이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병남은 지체 없이 법무부와 대한변협에 민원형식으로 악덕변호사의 응징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올렸다. 이런 사실은 병남의 변호사가 그 서면을 법원에 사건의 참고자료로 제출하여 알게 된 것이었다.
이정석(李正錫) 변호사의 「세상에 이런 사람이라서야!」(시민과 변호사 2002. 8.)를 보면 「점포에 대한 임대차기간이 만료되어 임대인이 명도를 청구하는 간단한 사건」을 처리하면서 겪은 「의뢰인으로부터 완전히 무력하고도 무능한 변호사로 오해를 받을 만큼 상대방으로부터 농락당한」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임대기간이 만료되어 명도를 통보했는데 버젓이 내부수리공사를 하고 있었고, 소를 제기했더니 소장조차 송달불능이었는데, 주민등록을 떼어보니 25회나 주소를 옮겼을 뿐만 아니라 제소이후에도 10일, 20일 간격으로 주소를 옮기는 판이니 주소 보정(補正)부터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1년 3개월 만에 끝난 그 소송사건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와 함께 그런 고약한 사람이 지금도 다른 악행을 계속하고 있는 사회를 개탄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 A라는 사기꾼이 병남과 비슷한 인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비슷한 종류의 사건은 변호사들이 숱하게 경험하고 있는 일일 것이고 오늘도 사회 구석구석에 멀쩡한 사람의 탈을 쓴 독벌레가 선량한 사람들을 울리고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