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이 출간되고 얼마 후 방송국 기자라고 하면서 전화로 그 간첩사건에 대한 내용을 읽고 일본에 있는 강희철의 부친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너무도 기뻐하더라는 말과 함께 현재 구명운동이 천주교 쪽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까지 알려주면서 조작간첩사건 리스트의 첫 머리에 위의 피고인 이름이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혹시 재심(再審)이라도 제기하게 되면 변호사님이 증인으로 나서 주실 용의가 없겠습니까 하는 말까지 했다. 천주교 측 구명운동본부에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되면서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좋은 일 하는 분들이 저렇게 있구나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 사람이 사면도 안 되고 아직 수감되어 있군요.”
“예.”
“감형도 안 되고요?”
“그런 모양입니다.”
나는 한동안 괴로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런 글을 왜 썼나, 쓰지 않았어야 할 것을 쓴 것은 아닌가, 결국은 오판(誤判)의 자성(自省)인데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나 나는 그 책에서 그 이야기를 빠트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들 그 사람이 진 무거운 짐을 덜 수는 없지만 나 스스로 어떤 멍에라도 지고 살아가는 것이 편했던 것이다.
하여간 강희철에 대한 상고심 주심법관의 술회(述懷)는 당장 그의 구명운동에 가속페달의 구실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형사사건에 대한 재심의 문은 여간해서 열리지 않는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다.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것(형사소송법 제420조 제5호)이 없는 이상 재심을 청구할 길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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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주교 차원에서 강희철 간첩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시도를 기사화 한 한겨레신문 1995년 5월 21일 자 기사 / 이 기사에서 강희철 간첩사건에 대해 내 소회인 '공소사실 자체의 조작성이 내다보여 1심부터 재판을 다시 해야 옳겠다고 생각했다' 라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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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8월 초. MBC 방송의 이완희 프로듀서와 이민숙 작가로부터 전화가 연달아 걸려왔다. 8. 15.특사와 관련하여 인터뷰를 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간첩조작사건의 주인공이 이번 특별사면(特別赦免)에 포함되는 듯 하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인가 공안‧시국사범 2백여 명이 특별사면에 포함된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 명단에는 우용각, 최선묵 씨 등 미전향 장기수와 민애전사건 관련 김낙중, 황인오, 사노맹사건 관련 박기평, 백태웅 씨 등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고 하면서, 강희철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무기징역이란 무거운 형을 받고도 유명한 공안사범(公安事犯)이나 덩치 큰 간첩이 아니라서 그런가.
8. 14. 한국일보 이태규 기자의 전화. “강희철, 특사로 석방됩니다.” 황야의 잡초에 지나지 않는 사람을 언론이 그렇게 기억해 주고 추적해 주고, 정말 고마웠다. 11. 27. MBC 이중현 프로듀서의 안내로 강희철 씨가 강남역 부근의 내 사무실로 왔다. 카메라가 뒤에 따르고. 나로서는 참으로 어색한 만남이었다. 나는 도대체 그에게 어떤 존재인가.
그에게 중형(重刑)을 확정한 사람이면서 한편으로 그의 무고(無辜)함을 증명해 준 사람인 셈이 되는가. 그가 고맙다고 인사하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은가. 차라리 원망이라도 들었으면. 내 인생 내 청춘을 망가뜨린 사람들의 음모에 희생된 줄 뻔히 알면서 끝내 오랏줄을 벗겨주지 못한 사람이라고 실컷 욕이나 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12. 18. 밤 11시 5분 다큐스페셜 「건널 수 없는 바다」가 방영되었다. 나는 혼자 그 심야프로를 보았다. 13년간 복역한 강희철(40세) 씨는 석방되자마자 꼭 한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박우동 변호사 사무실을 찾는다. 그를 만난 박 변호사는 할 말이 없다. 말문을 튼 것은 강희철 씨였다. 감사합니다. 박 변호사는 겨우 답한다. 아픈 과거는 잊고 굳세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잘 풀려야 할 터인데 걱정이라고 수심에 젖는다. 그가 그 동안 겪은 풍파의 과정과 지금은 제주도의 조천읍에 있는 옛집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오순도순 살아가는 모습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다큐멘터리는 끝난다.
강희철 씨를 처음 대하고 느낀 것은 너무도 순박하고 어질다는 것이었다. 수사기관도 아닌 법정에서 왜 자백했는가 물었을 때 그대로 “예, 예” 하기만 하면 1~2년 안에 풀려날 것이지만 만일 부인하면 도로 경찰 지하실에 끌려와서 고문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너무 무서워 어쩔 수 없었다는 진술을 이해할 만 했다. 그가 수감되어 있을 때 아이의 어머니는 집을 나가 버렸고, 아이는 일본의 아버지가 키웠다 한다. 그는 1998. 3. 13.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고, 같은 해 8. 15. 가석방되었다. 그리고 2000. 8. 20 제주에서 재혼하여 새 둥지를 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