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쓴 두 편의 글」은 1997. 11. 6. 법률신문에 실렸는데, 법원회보(제88호)에 실린 판사 두 분의 글을 읽고 그 감상을 놓치기 싫어 글을 쓴다고 되어 있다.
그 가운데 대전지방법원 전주혜(全珠惠) 판사의 글은 6년째의 판사생활에서 느낀 재판의 고뇌를 이야기하면서 그가 다룬 어느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을 예를 들고 있는데, 그 판결에 의하여 이상한 결말이 나오는 것을 내다보면서 소극적으로 넘기지 않을 수 없었던 아쉬움을 토로하는 내용이다.
나는 이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피고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여 주고 싶은 사건이었지만 법정형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더욱이 피고인이 간첩에게 전달한 국가기밀이란 것도 신문 등을 통하여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유죄로 인정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었지만, 당시의 대법원판례에 배치되는 판결을 선고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마음이 아팠지만 징역 3년 6월의 형이 선고되고 그 판결은 확정되었는데, 나중에 대법원판례가 변경되어 국가보안법상의 기밀(機密)의 해석이 바뀌고 보니 당시 종전 판례에 왜 과감히 맞서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대법원판례를 간과하여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일이 없도록 꾸준히 법률지식을 쌓아 가는 것도 판사로서 중요하지만, 이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대법원판례가 일반상식이나 형평성(衡平性)에 맞지 않는다는 의구심을 가진다면, 그 판례에 따른 판결을 선고하는 타성에서 벗어나서 형평성 있는 결론을 위하여 종전의 견해와 다른 판결을 선고하는 용기 있는 자세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쳐준 사건이었다.
법관으로서의 자세가 이러할 진데 어느 누가 사법부를 감싸지 않겠는가.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작년 이맘때 겪은 일이 생각난다.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의 상고심 변호인을 맡게 된 경위로부터 상고기각(上告棄却)의 판결이 있기까지를 이야기하자면 길다.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예순 살도 넘은 어설픈 간첩(間諜)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다만 한 가지 앞의 글처럼 양형(量衡)이 같은데다가, 가장 핵심적인 공소사실 부분이 국가기밀의 탐지‧수집이라는 점도 일치한다. 두 박스나 되는 기록을 낱낱이 검토하고 ‘국내에서의 적법한 절차 등을 거쳐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항이라도 반국가단체인 북한에게는 유리한 자료가 되고, 대한민국에는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면 국가기밀에 속한다.’는 종래의 판례에 저항하면서, 피고인이 저지른 일 그것을 시인하더라도 국가기밀이라 함은 당치 않다고 열심히 상고이유를 전개하였지만, 이유서가 접수되고 나흘째 되는 날의 발송인이 찍힌 선고기일 통지서가 날아오고 말았다. 그때의 당혹감, 좌절감, 피고인 가족들을 대하기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기가 민망하였던 그 때의 참담한 심경, 잘 잊히지 않는다.
이제 사 기밀이란 ‘국내에서 적법한 절차 등을 거쳐 이미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실, 물건 또는 지식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어야 하고’로 바뀌었지만, 이미 형이 확정된 위의 예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허탈감만 제공할 뿐이다. 판례(判例)의 변경(變更)으로 응당 살아나야 할 사람인데 길이 없어 희생을 감수하여야 한다는 것은 정의(正義)에 반한다. 정부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루속히 특사(特赦)의 은전이라도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법정형이 깎이어 겨우 3년 전이라도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법정형이 깎이어 겨우 3년 6월의 형을 받는 간첩이 자꾸 생겨서는 안 된다. 전 판사의 글은 법조인에게 많은 일깨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예순 살도 넘은 어설픈 간첩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왔다. 그런데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니 공소장의 범죄사실만 해도 32개항이나 되어 사건 내용을 추려서 소개하기도 어렵다. 다만 하나, 내가 상고심의 변호사로서 기록을 통하여 사건을 자세히 파악하게 되었고, 의문점 하나하나 피고인을 접견하여 풀었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피고인은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피고인을 위한 변호사의 입장에서 사건기록을 대하였기 때문에 판사의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나는 변호사가 되어 공안사범(公安事犯)의 사건 같은 것을 맡은 경험이 없다. 국가보안법과 같은 사건에 대한 변론의 의뢰는 애당초부터 없었거니와 형사사건의 공판정에 나가 여러 사람들 속에서 변론을 할 엄두가 나지 아니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서류만으로 처리되는 상고심사건은 특별히 피해야 할 종류의 사건이 아니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이 사건의 상고심을 맡도록 청을 받았을 때는 죄명도 그렇고 해서 어쩐지 조심스러워 수임(受任)을 주저했으나 항소심을 담당한 변호사들의 요청도 있고 해서 결국 응낙하게 되었다.
사건을 의뢰한 분은 피고인의 형으로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의사이며, 피고인 또한 학장을 지낸 대학교수로서 정년(停年)을 눈앞에 둔 역사학자인 점,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자체만 보고도 어딘가 허술하고 방대한 기록에 비추어 알맹이가 별 것 없는 내용의 범죄라는 느낌이 드는데다가, 선고형(宣告刑) 최 하한선인 3년 6월의 형량만 보아도 이른바 진짜 빨갱이 간첩이 아니구나 라는 직감이 든 점, 이런 이유로 해서 일단 자료를 검토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과연 사건은 문제가 많았다. 공작(工作)의 냄새가 상당히 풍겼다. 도대체 피고인은 젊은 시절은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산주의 사상의 의아심을 주는 어떠한 행동도 한 일이 없었고, 그 어떤 흔적도 남긴 적이 없었는데, 그런 학자가 늘그막에 와서 김일성주체사상을 교육받고 이적행위(利敵行爲)를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운 노릇이었다. 판결을 보면 피고인이 유죄로 된 결정적인 증거는 박 아무개라는 사람의 진술이었고, 거기다가 수사기관에서의 피고인의 자백진술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정체도 모호한 박이라는 사람의 고발(告發)을 발단으로 하여 수사가 개시된 것은 1993년 1월이었고, 그로부터 2년 3개월이 지난 1995년 4월에 국가안전기획부의 피의자신문조서가 처음으로 등장되는데, 그동안 피고인의 신상과 행적에 대하여 얼마나 추적하고 있었는지는 물으나 마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이라는 사람의 진술 외에는 보강증거(補强證據)라고 할 만한 자료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피고인에 대한 피의자 신문이 가혹해지는 것은 불문가지라 할 것이다.
사건기록에 의하면 변호인들은 피고인의 수사기관에서의 자백(自白)이 허위이며, 안기부 수사관이 피고인에 대하여 물리적‧정신적 폭행과 가혹행위를 한 것이 명백하다고 주장해 왔음은 물론이고, 피고인의 가족들은 담당검사의 폭행, 가혹행위에 대하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형사 고소를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변호사협회에서도 서울지검에 대해 진상규명과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 바 있었다.
수사기관에서의 자백에 대하여 그 임의성(任意性)에 의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신문(訊問)의 형식 자체에서도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어떤 때는 하루 두 번의 조서가 작성되어 안기부에서 22회, 검찰에서 14회의 피의자신문조서가 만들어졌다는 사실로서도 알 수 있었다. 피고인은 정년을 눈앞에 둔 학자로서 일본에서 성장하여 학업을 마쳤기 때문에 우리말이 어눌한데다가 한 번만 만나보고도 그 심성이 여리고 겁이 많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평생 경찰 같은 곳에 불려가 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으니 그 지독한 조사에 얼마나 시달렸는지는 능히 짐작되는 일이다. 그래서 그 자신에게 불리한 자백조차 공판정에서까지 연장되고 있었고,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공소사실 세 개 항목은 모두 검찰에서 시인했던 사실이며, 그 가운데 두 개 항목의 범죄사실은 변호인이 가까스로 제출한 출입국사실증명에 의하여 공소사실의 회합(會合)이 있을 수 없는 현장부재증명(現場不在證明)으로 누명을 벗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