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 3. 4. 사법연수원에서 신임법관 122명에 대한 연수(硏修)가 있었는데, ⌜법관의 길⌟이란 정해진 주제의 강사로 초빙되어 대강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결혼주례를 즐겁게 맡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정치인들을 더러 봅니다. 나도 신랑 신부되는 당사자 본인이나 다정한 친구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주례석에 올라서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것이 “주례선생님의 말씀”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나 하는 것입니다. 몇 시간 뒤 신혼여행을 떠날 가슴 설레는 신랑신부에게 서로 사랑하고 잘 살라는 부탁을 하면 그만이지 무슨 긴말이 필요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의 주례사는 되도록 짧게 합니다. 오늘 판사로 새 출발을 하는 여러분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재판 잘 하시라는 부탁밖에 더 있겠습니까.
법관생활을 오래한 한사람의 선배로서 이 자리에 서고 보니 36년 전의 초임시절이 눈에 선합니다. 재판을 멋지게 잘해 보겠다는 결의 같은 것을 하였느냐고요. 어림없는 일. 스물 몇 살에 판사가 되긴 했는데 뭘 아는 게 있어야지요. 참으로 겁이 나고 답답한 시기였습니다. 선배들이 쓴 판결서의 등본 철을 머리맡에 갖다 놓고 금과옥조로 모양새를 본 따는 게 첫째 일이었습니다. 재판실무에 도움을 줄 만한 책도 귀하고 판례집 같은 것도 정비가 되지 않아서 공부를 하려고 해도 힘들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법률신문에 몇 개 실리는 대법원 판례가 큰 영양제 구실을 했습니다. 재판의 생명은 주문(主文)입니다. 주문이 틀리면 판결이유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표현됐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판결의 결론은 쉽게 내놓고 이유를 만드는 데 골몰했습니다. 결론은 대개 재판장께서 내려 주셨으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지경의 초임판사시절이었으니 명재판의 꿈도, 명판사가 되겠다는 꿈도 꾸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시절은 그때와는 다릅니다. 훌륭한 대학교육을 받았고 어려운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돌파했습니다. 연수원에서 실무교육을 제대로 받았으며 거기에다가 발군의 성적으로 오늘의 임관(任官)에 이르렀습니다. 가슴이 고동칠 것입니다. 주위의 여건은 어떻습니까. 도서관에 가면 산더미 같은 지식의 정보가 쌓였고 큰 수고도 필요 없이 판례(判例)를 입수할 수 있습니다. 판례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1996. 1. 1.자 판례공보 반 달치 간행물에는 5건의 판례가 실려 있습니다. 세계 유례없는 분량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랑스럽다고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주위에는 또한 훌륭한 선배(先輩)가 포진하고 있습니다. 좋은 기기도 구비되어 있습니다. 공무원치고는 보수도 꽤 받는 편입니다. 재경근무도 희망하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나 한편 양지 뒤에는 음지가 있습니다. 일이 좀 많습니다. 어느 판사는 저녁 먹고 사무실에 다시 들어가 기록을 챙긴다고 합니다. 어느 부는 저녁 늦게까지 재판을 하는 것이 예사라고 합니다.
사건이 어렵습니다. 도대체 결론을 내리기도 어렵고 이유를 쓰기도 여기저기 걸립니다. 법정에서의 재판진행도 쉽지 않습니다. 당사자 본인소송은 법관으로 하여금 상당히 시달리게 합니다. 대리인도 매끄럽게 협조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청석의 눈치도 옛날처럼 법원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대량임관 때문에 훗날 승진에도 신경이 쓰입니다. 특히 고법부장 승진단계에 가면 고뇌와 갈등이 커집니다. 며칠 전에 있은 인사발령을 보지 않았습니까. 고법부장으로 승진한 여섯 명의 법관은 동료들의 눈물을 딛고 전진한 것입니다. 먼 훗날 이야기가 될 것이므로 여러분은 아직 걱정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 가서는 사정이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관임관이라는 영광의 그늘에는 많은 시련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직(聖職)에 비유되는 법관의 자리가 승진이니 보수니 하는 척도로 평가되는 것은 비극입니다. 여러분은 이를 극복하는 자세를 단련시켜야 합니다.
다시 앞서 이야기로 돌아가서 여러분에게 재판을 슬기롭게 해달라는 부탁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그 뿐입니다. 신랑신부에게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도록 부탁하듯이 나는 여러분에게 경건하게 합장(合掌)합니다. 재판을 잘 하시라고. 큰 사건이건 작은 사건이건 지혜를 동원하여 최선을 다하여 정의와 진실을 가려주셔야 합니다. 판사는 자기가 오판(誤判)한 사건의 기억을 없애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나의 경험에서 하는 말입니다. 오판이라고 확연히 낙인찍을 만한 과오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상고심판결 즉, 최종심판결 가운데 찜찜한 데가 있으면 참으로 괴롭습니다. 하급심판결의 경우 위에서 바로잡아주어 한결 부담이 덜하다 해도 그래도 부끄러운 기억은 잘 사라지지 않습니다. 골프 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골프는 잘 친 순간의 일만 기억에 생생하다고 합니다. 마작도 자일색(字一色:자패로만 구성된 족보. 자일색 자체만으로도 판수가 큰 데다 복합되는 족보가 많으므로 대단히 큰 판수가 보장되는 족보다.)같은 것을 성공한 때의 즐거운 추억은 오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판은 그 반대입니다. 판사의 업무가 정신적으로 고달픈 이유를 알만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판사는 책임감 속에서 번민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주변에서 자기 재판은 위에서 한 번도 파기된 일이 없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매우 우수하지만 상급심에서 파기되지 않는 판결을 목표로 재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새 출발의 판사님들께서는 올바른 재판을 하기 위해 사법연수원에서 많은 수련을 쌓아왔습니다. 무엇이 정(正)이고 무엇이 사(邪)냐를 가리기 위한 재능을 열심히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파심에서 한 가지만 당부한다면 시야(視野)를 넓히시라는 것입니다. 지난 2. 26.자 조선일보를 보면 ⌜변호사 대거 정치입문, 찬반 논쟁⌟이란 제목으로 법조인들의 정계입문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법률가들은 형식논리에 치우쳐 있고 법조문에 지나치게 얽매어 실질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고식적, 관료적, 권위주의적이어서 여론을 수렴하고 창조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는 거리가 있다. 정치는 세를 모으는 과정인데 법률가들은 개인주의성향이 강하다, 이러한 지적들이 부정적인 반응이라는 것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법률가들의 합리적 사고방식이 정치문화발전에 기여한다거나, 법률가들은 체질상 법을 현저히 위반하거나 무리한 일은 하지 않으며, 길거리 선동정치와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부에서의 이러한 지적에 대하여 한마디로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입법부에 율사(律師)가 필요 없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그러나 어째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도록 법률가들의 활약이 미미했었던가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하여간 법률의 자구(字句)에만 집착하다 보니 법관은 시야가 좁다는 그런 지적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법관은 검사가 기소한 사건, 당사자가 신청한 사건에 대하여, 그것도 공소사실 범위 내에서, 또는 당사자의 청구취지와 청구원인에 속박받아 판단을 해야 하는 제한이 있으니 눈을 크게 떠서 시야를 아무리 넓게 보려 해도,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려 해도, 나무 하나하나의 형태와 특징을 살피지 않고는 한치 앞도 나아가지 못할 사정입니다. 이러니 숲을 봐야 하는 고달픔은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긴 소리 할 것 없습니다. 판사가 하급공무원의 기만 원짜리 수뢰죄를 유죄로 해서 옷을 벗기고 하찮은 좀도둑들도 징역 보내는 동안 이 나라의 영도자들은 수천 억 천문학적인 돈을 챙기고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법관은 사법(司法)의 정의를 실현하는데 노력해야 하며, 그래도 법관은 기만 원짜리 수뢰죄를, 좀도둑을 처벌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법관은 그런 세태를 알고 재판해야 합니다.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고 재판에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