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에게 시종 불리한 증거가 된 박이라는 사람 역시 대학교수인데, 그는 다양한 재야활동(在野活動)을 해오고 있었는 바, 기록에 나타난 것만 보아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감사, 평화와통일을위한연대회의 공동의장 등을 역임했으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등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사람이었다. 위와 같은 자신의 처지로 인하여 과거부터 안기부의 회유와 협박을 받아 왔고, 1994. 3. 2.부터 약 10일간 안기부 수사관들에 의해 시내 호텔에서 집중조사를 받았다고 스스로 진술했다.
그 조사 내용은 박을 수괴(首魁)로 하는 지하당(반국가단체)의 구축에 관한 것이었는데, 박은 그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아니했으나 변호인의 반대신문 과정에 나타난 것은 혐의 내용 중 일본의 한통령(구명(舊名) 한민통:한국민주통일연합)의 의장인 곽동의 등을 만났다는 점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한통련이 반국가단체임은 판례에서 인정한 터이므로 그렇다면 박은 반국가단체의 구성원과 회합한 혐의 등으로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검찰은 박이 위와 같은 사실을 시인하는데도 기소(起訴)를 하지 아니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박은 그대로 석방되고 박의 진술조서를 토대로 오히려 피고인이 구속되기에 이른 것이다.
박이 한통령 임원들과 회합한 부분에 관하여 안기부에서는 이미 1992년 경 다른 간첩사건 당시 박에게 그 점을 추궁했음이 나타났고, 적어도 그 무렵에는 박도 자신의 혐의가 안기부의 레이더에 걸린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변호인들은 박에 대하여 안기부의 협력자가 되고 있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박의 진술은 피고인에 대한 유일한 직접증거로서 철저히 작용하는데, 그의 진술에 의하여 일본에 있는 서 아무개라는 고정간첩이 등장하게 된다. 피고인은 일본에서 그로부터 「소한강」이라는 공작명(工作名)을 부여받게 되며, 호텔에서 주체사상교육을 받고 피바다 등의 북한 영화를 보게 된다. 그리고 김일성 서거를 애도하는 추도문과 김정일의 생신축하문을 작성하여 서에게 교부한다. 그리하여 공소사실은 대부분 피고인이 언제 일본 어디에서 서를 만나 무슨 무슨 지령을 받고 목적수행을 위하여 잠입했다는 투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렇게 피고인은 충성스러운 골수간첩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기록을 살펴보면 아무런 물증(物證)이 없는데도 조사관이 묻는 대로 “예, 예” 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피고인 정도의 수준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정략이었다. 물론 그때는 검찰이나 법정에 가서 번복하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것이고, 어둡고 긴 터널을 한시바삐 벗어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구치소에서 변호인에게 잠을 재우지 않고 폭언, 협박, 폭행과 함께 부르는 대로 써도 써도 한이 없는 자술서(自述書) 때문에 죽어 나갈 것만 같았고, 고문치사 당한 박종철 생각만 나더라면서 무슨 일이건 간에 “예, 그렇습니다.”하고 답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고 했다. 살길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자살할 방법만 궁리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제1심 재판 당시 변호사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노동당입당 관계도 시인했다고 말했더니 변호사가 깜짝 놀라며 그럴 수가 있느냐고 꾸짖어 그때서야 노동당입당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는 것인 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다음날 입당관계문제는 바로 잡겠다고 조사관에게 그 부분을 빼달라고 했더니 그러면 다른 큰 것 하나 내놓으라고 하면서 폭행만 당했고, 검찰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욕만 듣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일성 추도문을 쓰지 아니했다고 고치려 했다가 혼이 나고 해서 그 어떤 사항도 수정할 엄두가 나지 아니하여 만사 될 대로 되어라 그 후로 체념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피고인은 이렇게 여린 성품의 소유자였다.
상고이유서(上告理由書)는 1996. 4. 12. 마감 날 대법원 숙직실에 접수되었다. 서울고등법원에서 2. 23. 선고되고 당사자로부터 2. 27. 수임하여 그 동안 두 박스나 되는 기록과 씨름했던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 결과는 상고기각.
여기서 그 판결의 주문(主文)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만 이야기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대법원은 1996. 6. 14. 피고인과 검사의 상고를 모두 기각하는 판결(96도804)을 선고했는데, 그 이유 중 국가보안법 제4조 제1항 제2호 (나)목 소정의 국가기밀(國家機密)에 관한 판단부분만 소개해 본다.
「국가기밀이라 함은 반국가단체에 대하여 비밀로 하거나 확인되지 아니함이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정보자료로서, 순전한 의미에서의 국가기밀에 한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관한 국가의 기밀사항이 포함되며, 그것이 국내에서의 적법한 절차 등을 거쳐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항이라도 반국가단체인 북한에게는 유리한 자료가 되고, 대한민국에는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면 국가기밀에 속한다는 것이 당원의 확립된 견해인 바(당원 1993. 10. 8. 선고 93도1951 판결, 1995. 7. 25. 선고 95도1148 판결 등 참조), 원심이 같은 취지에서 피고인이 탐지‧수집하여 공소 외 서에게 누설한 사항이 국가기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음은 옳고, 거기에 소론과 같은 국가기밀에 관한 법리오해의 위법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국가기밀의 귀속주체인 국가가 아닌 곳에서 지득한 공지의 사실의 경우에는 국가기밀성이 없다는 취지의 주장은 독자적인 견해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점에 관한 상고이유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원심이 피고인에 대한 범죄사실 가운데 국가기밀을 탐지‧수집‧누설하여 간첩하였다는 부분을 유죄로 인정한 내용을 보면, 1991. 12. 초순 경 일본 도쿄역 부근 상호미상 레스토랑에서 서를 만나 그로부터 ‘요즈음 대학생들은 조용히 있느냐.’라는 말을 듣고, 그에게 ‘요즈음 학생들은 데모의 이슈가 없어지니까 모두 개인주의로 돌아가 하나로 뭉치기가 어렵다. 학생들은 외적인 문제보다는 학내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등록금 인하투쟁, 재단이사장 및 총장과의 문제 등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고하자, 그가 ‘요즘 학생들이 편협한 학내 문제만 가지고 떠든다니 왜 그렇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라고 말하였다는 것,
1992. 8.경 서울 강남구 소재 강남시립병원에서 경북중 동창생으로 노태우 대통령과 가장 친하다고 알려진 동 병원원장인 신 씨를 만나 그에게 노 대통령은 자주 만나보느냐고 묻자, 그가 ‘나는 가끔 만나서 부부가 함께 테니스를 치곤 한다.’라는 말을 듣고 다시 그에게 형(전 국무총리)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느냐, 형 집에는 자주 가느냐고 묻자, ‘형은 바빠서 거의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대답을 듣는 등 노 대통령과 신 전 국무총리에 접근하기 위하여 그들의 근황을 알아보고, 1992. 10.하순 일자미상 15:00경 일본 카마타(蒲田)역 인근 상호미상 레스토랑에서 서를 만나, 그에게 ‘이 사진은 지난 8일 노 대통령 60회 생신 때 경북중 동창생들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하여 찍은 사진이다.’라고 하면서 피고인의 청와대 방문시의 동향을 상세히 설명한 후 피고인이 노 대통령과 촬영한 기념사진 1매를 서에게 제공하였다는 것. ‥‥등입니다.
위에서 대강 원심이 인정한 범죄사실 일부를 보았지만, 국가기밀탐지 등에 관한 공소사실 자체에서 도대체 어느 부분이 국가기밀에 속한다는 것인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국가기밀은 우선 기밀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밀의 귀속, 보유주체는 국가여야 합니다. 기밀성이 없는 공지의 사실인 경우나 그 기밀이 개인의 신상에 관한 것이고 국가에 귀속되는 내용이 아닌 경우에는 국가 기밀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공지의 사실인 경우에도 예외적으로 국가기밀로 인정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 수집원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나라가 북한에 쌀을 지원할 계획이 있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어 공지의 사실이 된 경우에는 신문을 보고 이를 지득한 자가 그 내용을 누설하였다고 하여 국가기밀의 누설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예컨대 국토통일원의 회의자료에서 본 후 이를 누설하였다면 이는 공지의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정보의 정확성 때문에 국가기밀누설로 처벌될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