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공지의 사실은 원칙적이고 국가기밀이 될 수 없지만, 이를 수집한 원천이 비밀을 필요로 하는 곳인 경우에 한하여 국가기밀이 되는 것입니다. 기밀이라는 것은 그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탐지행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탐지자가 국가의 중요기관으로부터 탐지한 것이라면 내용이 비록 공지의 사실이라 하더라도 국가기밀탐지행위가 되는 것이며, 같은 내용의 공지의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면 탐지행위로 처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종래의 대법원판결에서 ‘공지의 사실인 경우도 국가기밀의 누설이 될 수 있다.’는 본래의 취지는 ‘공지의 사실도 국가기밀’이라는 취지로 오해되어서는 안 되며, 국가기밀 중에는 공지의 사실이 된 경우도 있지만 그 기밀이 공지의 사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누설행위가 면책되는 것이 아니라는 취지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국군정보사령부가 서초동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가기밀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서초동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는 공지의 사실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반국가단체 구성원에게 국군정보사령부가 서초동에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면, 정보사령부가 서초동에 있다는 사실이 공지의 사실이라고 하는 사유만으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를 확대해석하여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공지의 사실도 모두 국가기밀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가기밀 중에는 공지의 사실인 경우도 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며, ‘공지의 사실도 국가기밀이 된다.’는 표현은 위험한 것입니다. 국가기밀은 공지의 사실이 되더라도 국가기밀인 반면, 국가기밀이 아닌 것은 누구 손에 들어가든 국가기밀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공지의 사실임에도 국가기밀누설로 처벌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한 법원의 명확한 이해와 요건구성이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내가 누구와 친하다.’든가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든가 하는 일신상의 문제는 개인의 비밀이 될 수는 있어도 국가의 기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사건의 경우 피고인이 지득한 사실은 모두 언론에 누누이 언급된 공지의 사실이며, 이를 특별히 보호할 만한 수집원에서 탐지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대부분 개인신상이나 개인적 의견에 관한 것으로서 어느 모로 보나 국가기밀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원심은 범죄로 인정하였지만 피고인은 신과 매우 가까운 사이이고, 그는 당시 노 대통령과 친했으며, 형이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이기 때문에 신을 만나면 피고인뿐 아니라 누구나 노 대통령, 신현확 씨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것이며 피고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의례적으로 안부를 물었고, 의례적으로 답하였을 뿐인 그 내용을 가지고 국가기밀탐지행위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사건의 경우 가사 피고인의 행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수집‧누설하였다는 내용 대부분은 개인적인 내용이거나 의견 또는 추측이고, 반국가단체에 별달리 유리한 자료가 된다거나 우리나라에 특별히 불이익을 초래할 내용이어서 법에서 예정하는 바와 같은 중형(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야 할 대상의 것들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위와 같은 성질의 대화내용이나 의견 같은 것은 처벌대상의 국가기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석하여야 합니다.
대법원은 국가기밀에 대하여 ‘반국가단체에 대하여 비밀로 하거나 확인되지 아니함이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정보자료로서, 순전한 의미에서의 국가기밀에 한하지 아니하고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각 방면에 관한 국가의 모든 기밀사항이 포함되며, 그것이 국내에서의 적법한 절차 등을 거쳐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항이라도 반국가단체인 북한에게는 유리한 자료가 되고 대한민국에게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면 국가기밀에 속한다.’고 일관되게 판시하여 왔는데, 그러한 설시는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며, 위의 판시에 의하더라도 기밀사항이 되는 대화내용이라야 국가기밀이 된다는 취지이지, 단순한 개인적 신상에 관한 의견이나 추측 같은 것을 모조리 국가기밀누설이라고 단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소 장황하게 변호인의 주장을 소개했지만 이런 상고이유를 배척한 위의 판결은 불과 1년 뒤에 대법원 전원합의체(全員合議體)판결에 의하여 폐기되고 만다.
즉 대법원은 1997. 7. 16. 국가기밀에 관한 종래의 견해를 변경하고, 「현행 국가보안법 제4조 제1항 제2호 (나)목에 정한 기밀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기밀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관하여 반국가단체에 대하여 비밀로 하거나 확인되지 아니함이 대한민국의 이익이 되는 모든 사실, 물건 또는 지식으로서, 그것들이 국내에서의 적법한 절차 등을 거쳐 이미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실, 물건 또는 지식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어야 하고, 또 그 내용이 누설되는 경우 국가의 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기밀로 보호할 실질가치를 갖춘 것이어야 할 것이다」라고 판단(97도985)했던 것이다. 이것이 서두에서 말한 ‘법원회보’의 이야기 내용이다.
이리하여 피고인의 유죄판결(有罪判決)은 애쓴 보람도 없이 확정되고 마는데, 대법원의 판결 선고과정이 하도 별나서 한번 공개해 보기로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변호인의 상고이유서는 4. 12. 밤에 접수되었다. 그래서 다소 긴장을 늦추고 지나던 5. 3. 느닷없이 판결선고 기일통지가 날아오지 않는가. 두 번 세 번 눈을 비비고 보아도 틀림없이 피고인에 대한 선고기일의 통지였고, 5. 10. 오후 1시 30분에 판결한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온 몸에 맥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전문가로서의 비관적(悲觀的)인 느낌이다. 가만히 달력을 보면서 역산(逆算)을 해보았다. 상고이유서를 접수한 4. 12.은 금요일 밤이었으므로 다음날 기록에 철해진다고 보아도 빨라야 4. 15. 월요일에 상고이유서가 대법관실에 들어간다. 4. 26. 금요일 합의에 돌려지고, 5. 10. 선고하기로 한 것이므로 주심대법관이 변호인의 상고이유서를 바탕으로 기록을 검토할 수 있는 시간은 4. 15.부터 토요일 일요일 포함해서 11일간이다. 피고인의 구속만료기간도 6. 25.쯤 되어 여유가 많은데 왜 그리 서둘러 판결하는 것일까. 주심대법관의 성향을 보아서도 상고기각이 틀림없는데 그렇게도 자신만만한 사건에 속할까.
가족들은 혹시 파기점(破棄点)을 발견하여 하루라도 빨리 풀어주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행복한 추리도 해보는 모양이었다. 피고인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발버둥 치던 가족들이 나중에 충격을 덜 받도록 변호사로서는 「상고기각 99%」라는 의견이니 기대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여 한동안 할 말을 잊고 있다가 그래도 뭔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대법관들이 상고이유서를 보지 않고 합의를 하는 수도 있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상고이유서가 40쪽이나 되고 기록도 엄청나게 많은데 언제 다 검토했다는 것입니까?”
“하여간 다 검토했겠지요.”
나의 심경은 착잡했다. 판결의 결과가 뻔한 것이라면 이대로 앉아 선고를 기다리기는 변호사의 자존심으로도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링에 올라간 선수가 종소리의 여운도 사라지기 전에 한방에 녹아웃(Knock-out)되는 것과 같다. 어이없고 수치스럽고 피고인과 가족들을 대할 면목도 없다.
그러나 무슨 방법이 없다. 상고이유보충서(上告理由補充書)나 내보기로 했다. 부질없는 짓이지만 그밖에 별 도리가 없다.
「피고인이 검찰에서의 가혹한 조사를 이유로 대한변호사협회의 구조(救助)를 받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바 있는데, 그 청구원인사실에 의하면 피고인이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치되어 조사받을 때 안전기획부에서 진술한 내용을 부인하기만 하면 연로한 피고인에게 이 새끼, 이 놈의 자식 등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고 수갑을 찬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는 피고인을 발길질하고, 피고인에게 유리한 내용의 진술은 법정에 가서 하라고 조서에 한 점도 기재해 주지 아니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검사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가 피고인의 범죄사실을 인정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위험스럽기 그지없고 허무할 뿐입니다. 이런 비극이 오늘날에도 실재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적 수치가 아닐 수 없으며 사법부에서 과감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고이유보충서를 접수시키면서 동시에 대법원 제2부 관여대법관 네 분에게 따로 따로 우송하는 요령도 피웠다. 그러나 만에 하나 재합의(再合議)의 기회를 기대해 본 것도 허사. 현직 대학교수신분의 간첩사건이라 하여 사회적으로 제법 주목을 받던 이 사건은 무슨 자비(慈悲)라도 베푸는 듯 선고기일만 한 달 연기되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