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대법원 2002. 2. 8. 선고 2001도6425 판결
(원심 고등군사법원)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보면, 피고인은 처와 자식이 있는 20대 후반의 성숙한 남성으로서 약 1년 6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9명의 부녀자를 연쇄적으로 강간하는 범행을 저질렀고, 특히 그 범행과정에서 만 14세의 어린 여학생을 강간하거나 여동생을 묶어놓고 그 언니를 강간하고, 약 3개월 후 동일한 피해자를 재차 강간했으며, 피해자의 아들을 이불로 뒤집어 씌워놓고 피해자를 강간하는 등 대담하고 극악한 방법으로 피해자들을 유린했다.
이후 이러한 범행을 뉘우치지 아니한 채 위 각 강간 등의 범행에 대하여 중형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을 기다리던 중 도주하여 다시 이 사건 강도살인의 범행을 저질렀는데, 피고인이 도피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피해자 갑의 숙소에 침입한 후, 18세의 여성인 갑이 특별히 반항하거나 저항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로지 자신의 범행사실과 도주자로서의 신분이 탄로 날 것이 두려워 갑을 이불과 베개로 눌러 질식시켜 살해하고, 마치 갑이 잠을 자는 것처럼 위장해 놓고 자신의 발자국을 수건으로 닦고 갑으로부터 강취한 물건을 갑의 가방에 넣어 범행현장을 빠져나옴으로써 적극적이고 대담하게 범행의 은폐를 기도했다.
위 강도 살인의 범행 후에도 친구 을을 이용하여 갑으로부터 강취한 신용카드로 현금을 인출하거나 컴퓨터를 구입하고, 범행이 탄로날 것에 대비하여 을로 하여금 알리바이를 조작하도록 했으며, 그 후 체포될 때까지 수일간을 태연하게 컴퓨터게임을 즐기며 지내고, 체포된 이후에도 고의적으로 정신이상증세가 있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범행을 부인하다가 을의 진술을 토대로 한 수사관들의 추궁에 못 이겨 범행을 자인하는 등 반성과 회개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대법원의 파기이유는 대강 이렇다.
「피고인은 1976년생으로서 실내장식업을 하는 부모 슬하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사병으로 군에 입대하였다가, 사관후보생에 지원하여 1998. 10. 1. 소위로 임관된 뒤 1998. 10. 7. 육군 제11사단에 부임하였고, 이 사건 범행 당시 위 사단 예하 20연대 소속 장교로 근무해 왔으며, 1998. 6월경 혼인하여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고 남들과 다름없는 가정생활을 하던 자로서 이 사건 범행 이외에는 별다른 전과가 없는 사실, 피고인은 부임 초기 부대 내의 인터넷교관으로 활동하는 등 임무수행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고 성실하게 근무하면서 대인관계도 원만하였던 사실을 각 알 수 있는 바, 이러한 피고인의 나이, 성장과정, 성행, 가정환경, 경력 등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은 아직도 교화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보인다.
나아가, 기록에 나타난 이 사건 범행 및 범행 후의 정황 등에 관하여 보면, 피고인은 1999년 여름경부터 부대 근무시간 이후에 심야까지 인터넷과 PC게임 등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부부간에 말다툼이 생김과 동시에 동료들과의 대화가 줄어들게 되었고, 급기야 인터넷을 통하여 외국의 포르노 동영상 등 음란물에 탐닉하여 무분별한 성적 망상과 충동에 빠진 끝에 이 사건 강간 등의 범행을 저지르게 되었는데, 피고인이 위 강간 등의 범행으로 제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도주한 후 피해자 갑의 금품을 강취하고 동인을 살해하게 된 것은 처음부터 계획하고 의도한 것이 아니라 금품강취 후 갑이 소리를 지르며 방에서 도망하려고 하자 자신의 강취범행과 당시 탈영하여 도주 중인 사정이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순간적으로 흥분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갑을 살해한 것으로 보이는 사실, 위 강도살인 등의 범행으로 다시 체포되어 기소된 이후부터는 원심법정에 이르기까지 살인의 범의 등 일부의 사실을 제외한 나머지 이 사건 각 범행을 순순히 자백하고 피해자들에게 끼친 고통과 상처에 대하여 깊이 참회하고 반성하고 있는 사실을 각 알 수 있다.
사실관계가 이와 같다면, 피고인이 국토를 방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여야 하는 사명을 지닌 군인이자 부하장병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장교의 신분으로서 연약한 피해자들을 상대로 도저히 용서받기 어려운 원심 판시의 이 사건 각 범행을 저지른 점에서 원심이 설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피고인을 마땅히 중형에 처하여야 할 사정이 있음은 충분히 인정된다고 할 것이나, 위와 같은 피고인의 나이, 경력, 범행동기, 범행내용과 범행 후의 정황 등 양형조건이 되는 제반 사항과 아울러 앞서 본 사형의 형벌로서의 특수성이나 다른 유사사건에서의 일반적인 양형과의 균형 등에 비추어 볼 때, 원심이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그 형의 양정이 심히 부당하다고 인정할 현저한 사유가 있는 때에 해당된다.」
라. 대법원 2003. 6. 13. 선고 2003도924 판결
(원심 부산고등법원)
피고인은 25세로서 특수강도와 절도죄 등으로 형을 마치고 출소한 뒤 2년여 지난 2001년 12월 교통사고를 당하여 뇌좌상 등으로 2개월 동안 입원치료를 받고 퇴원했는데, 그 직후인 2002년 3월 다방 여종업원에 대하여 강도강간을 하고, 이를 시작으로 약 7개월의 단기간에 걸쳐 강간등살인(미수) 3회, 특수강도강간 3회, 강도상해 5회, 강도 2회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원심이 인정한 바에 의하면, 피고인은 유흥비 등을 마련할 목적으로 재물을 절취하거나 연약한 부녀자들을 상대로 흉기 등을 이용하여 손쉽게 금품을 강취했고, 나아가 자신의 가학적이고도 변태적인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피해자들을 강간했으며, 또한 강간과정에서 일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는 이유로 신고를 두려워한 나머지 살인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원심은 나아가 망치를 오토바이 안장 속에 넣어 타고 다니면서 범행대상을 물색하는 등 범행이 대담하고 용의주도하며, 피해자를 주먹과 발로 무자비하게 때리고 짓밟는가 하면, 망치로 머리를 내리쳐서 피를 흘리고 실신한 채 신음소리를 내면서 죽어 가는 피해자를 강간하고,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이 피고인의 얼굴을 보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는 경찰에 신고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실신한 피해자들의 얼굴을 축구공 차듯이 힘껏 걷어차고 복부와 가슴 등을 마구 짓밟아 무참히 살해하는 등 너무나도 잔인한 범행들을 저질렀다고 판단하고, 피고인의 범행으로 두 여자는 사망하고, 한 여자는 피고인이 사망한 것으로 오인하고 현장을 떠나는 바람에 생명을 건지긴 했으나 중상을 입었으며, 또 한 여자는 강간당한 충격으로 심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범죄사실을 인정했다. 제1심, 제2심 모두 사형.
대법원은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환송하면서 그 이유로, 「법원은 기록에 나타난 양형조건들을 평면적으로만 참작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피고인의 주관적인 양형요소인 성행과 환경, 지능, 재범의 위험성, 개선교화 가능성 등을 심사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하여 이를 통하여 사형선택 여부를 심사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고, 피고인이 범행을 결의하고 준비하며 실행할 당시를 전후한 피고인의 정신상태나 심리상태의 변화 등에 대하여서도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등 관련 분야의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는 등 깊이 있는 심리를 하여 본 다음에 그 결과를 종합하여 양형에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의 경우 피고인의 범행 전후에 걸친 정신상태나 심리적 상태의 변화에 대하여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는 등 객관적인 조사를 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고, 피고인의 교통사고로 인한 병력이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피고인의 심리상태나 정신상태에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의 여지도 없지 않다고 설명하고, 피고인이 20대의 젊은 나이이고 수사기관 이래 범행을 순순히 자백하면서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점과 피고인의 성장환경 등을 보면 피고인 어머니의 증언을 듣는 외에는 달리 피고인의 양형조건에 대한 조사나 심리를 별도로 해보지 않고, 수사기록에 나타난 양정자료만을 토대로 간이한 심리만을 끝으로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제1심을 그대로 유지한 원심엔 사형의 양형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형의 양정에 관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한 위법이 있다고 판단했다.
서두에서 위의 대법원판결에 대하여 심상치 않은 예감을 풍기는 것처럼 말했으나 판결내용을 읽어보면 사형제도의 폐지를 시사하거나 사형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하는 식의 주문을 강력하게 비춰주고 있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새삼스럽게 형의 양정(量定(이란 것이 그렇게 어렵구나 하는 느낌에다가 생(生)이냐 사(死)냐 하는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최종심의 고뇌가 서려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대법원의 그와 같은 연쇄적인 사형거부판결에 대하여 하급심이 앞으로 어떤 경향으로 받아들일 것인지가 주목된다. 사형판결을 신중히 하지 않는 판사가 어디 있으랴마는 앞으로 사형판결은 상고심에서 통과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강하게 지배할 것은 틀림없고, 따라서 하급심의 사형선고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좀 더 주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대법원의 태도는 작금의 사형폐지운동(死刑廢止運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