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찾는 푸근한 발길 (37화)

고향(故鄕)에 대하여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 또는 자기 조상이 오래 누리어 살던 곳이라고 되어 있다. 태어난 곳에서 오래 살았다면 그곳이야말로 진짜 정다운 고향일 것이다.

나는 함안(咸安)이 고향이다. 그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함안, 그것도 기차역에서 이십 리나 떨어진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외암초등학교(옛날에는 여항 제2국민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다녔다. 그러다가 바다가 있는 소도시 진해(鎭海)로 이사 가서 경화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녔고, 다시 출생지로 귀향하여 1년쯤 살다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또다시 진해로 가서 도천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진해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부산(釜山)에서 고등학교생활을 했으며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이처럼 함안이 고향인 것은 분명하나 오래 산 곳은 진해이다. 열여섯 살 때부터 외지생활을 했지만 우리 집 둥지는 줄곧 진해였다. 그래서 나의 옛날 친구는 진해와 부산에 많다. 그래서 진해도 제2의 고향임이 틀림없다.

고향이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우리 세대가 말하는 그런 고향이란 개념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대부분이 서울이나 부산, 광주 같은 대도시에서 출생하고 시골에서 태어났다고 한들 머지않아 도시로 이사하게 되고 편의상 본적지도 옮기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고향의 정취는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우리 집 아이들만 해도 그렇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태어나고 그래서 호적부 같은 문서에 본적(本籍)이 아버지의 출생지로 되어 있지만 일 년에 한 번쯤 성묘를 갈 때 따라가서 본 시골이 아버지의 고향이지 나하고는 관계없는 고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맞다. 아이들에게는 우리가 말하는 고향이 없는 것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 우는 곳」 정지용의 「향수」를 읽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감흥을 받을 리가 없다.

옛날의 고향은 모두 시골이었다. 서울조차 좀 큰 시골이 모인 도시였다. 거기에 고향이 있고 향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향이 있어도 산하가 많이 변해서 고향의 정겨운 냄새가 사라지고 있다. 내가 태어날 때 열 가구 남짓한 샛담부락 앞에는 신작로로 통하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비가 쏟아진 다음날 아침의 강물은 노도처럼 무섭게 흘러 책보자기를 등에 동여 맨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나하나 업어 주기를 기다렸다. 나는 지금도 세찬 물살을 조심조심 헤쳐 건네주신 어른들의 그 체취를 잊지 못하는 것 같다. 그 후 새마을사업이 한창일 때 다리가 놓였지만 멱을 감던 그 강물은 오래전부터 많이 줄었다.

▲ 부산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 나는 고향은 함안이지만 중학은 진해에서,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다녔다

신작로는 종일 달구지나 몇 번 지나갈까 한가했었는데 이제는 길도 넓어지고 포장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의 왕래가 제법 빈번하다. 동리에는 전기도 들어와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고 텔레비전이 있다. 그래서 옛날처럼 저녁을 먹고 넓은 마당에 모여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기를 쫓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얼마 전 아내와 함께 고향마을에 들러 할아버지, 할머니가 기거하시던 그 위치의 방에서 어릴 적 포근한 추억을 떠올리며 하룻밤을 보냈다. 성묘(省墓)를 위해 해마다 고향에 들르지만 훌쩍 당일치기로 떠나버리곤 한 것이 아쉬웠던 참이었다. 뒷산 꼭대기 캄캄한 수목 사이로 떠오르는 둥근 달이랑, 모내기가 끝난 논에 개구리들이 와글와글 소낙비처럼 토해내고 있는 소리는 분명히 옛날에 보고 들은 밤의 풍치 그대로였다.

이른 아침 소 몰던 고개에 올라가 볼까 하고 나서 보았지만 옛날의 아카시아 진한 향내 풍긴 길은 없었다. 수목이 울창해서 한발도 나아갈 수 없었다. 지금의 농촌은 인구가 줄면서 일손이 딸리는 반면에 자연은 제멋대로 번식하고 성장하는 것 같다.

내가 입학한 초등학교에 가 보았다. 바로 그 자리에 단정하고 아담한 단층건물이 앉아 있고, 교실 앞 화단에는 가지가지 화초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공부하는 어린이들은 모두 고운 심성을 지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슬픈 것은 아이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는 점점 텅 비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농촌이나 마찬가지지만 젊은이들은 하나 둘 대처(大處)로 떠나고 있다. 새벽같이 들에 나가 보았더니 과연 노인들만 허리를 굽혀 일하고 있었다. 비싼 품삯에도 사람이 귀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되는가. 저 노인인구가 늙어 사라지면 누가 이 농촌을 지킬 것인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군청과 기차역이 있는 읍으로 가기만 해도 농촌의 풍경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벼가 익어 황금빛 출렁이는 넓은 들판에 어느 날 고층 아파트가 한 채 덩그러니 들어섰다. 마산에서 고속도로로 함안에 들어서면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늠름하게 어깨를 펴고 있는 여항산(餘航山)인데, 그와 함께 눈에 들어오는 것이 그 어울리지 않는 건조물이다. 머지않아 저 들판도 비슷한 형태의 아파트로 들어찰 것이고 보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하는 고향은 단지 노래 속에 남아 숨 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