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39화)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빛바랜 단체사진을 자세히 보면 나는 까까머리에 한복 조끼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촌놈들 속에 위풍당당한 자세다. 입학식이 있은 직후 담임선생님이 우리 꼬마들을 앉혀 놓고 누가 반장(급장)할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셨다. 그 순간 나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누구에게 뒤질세라 힘차게 손을 들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싱글싱글 웃고 아이들도 웃고 그랬다. 아차, 사방을 돌아보니 손을 든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나는 힘없이 들었던 손을 내렸다. 부끄럽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선생님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으셨다면서 “손을 든 것은 잘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이 웃는다고 해서 손을 금방 내린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나를 반장으로 임명했고 전학으로 떠나기까지 반장을 계속 맡았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 입후보하여 무투표당선을 한 셈인데 다시 그런 절호의 기회는 오지 않았고 별로 뛰어나지도 못해서 그 후로 한 번도 반장 같은 것을 해보지 못했다.

전학한 학교에서는 담임선생이 반장후보를 지명하고 급우들에게 의견을 물어 찬성을 하면 그 학기의 반장으로 임명하고 있었고 반장이 되면 배지를 달게 했다. 일본여자인 담임선생님은 「키야마 마사오」(창씨명)인 나를 반장으로 했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나 자신 전학 온지 얼마 되지도 아니한 터이어서 반장이 될 생각은 가져본 일이 없었는데 선생님의 추천에 나도 놀랐다. 아이들은 나에 대하여 침묵으로 거부의 의사표시를 했다. 선생님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종전까지 반장을 해 오던 나이 많고 덩치 큰 아이를 재지명했다. 아이들은 박수를 쳤다.

다음날 나는 반장 일당에게 운동장 모서리로 불려갔다. 키와 몸집이 나하고 비슷한 한 놈이 나서서 한판 붙어보자고 했다. ‘선생님에게 잘 보이면 다인 줄 아나 인마.’ 싸우기 싫다고 뒤를 빼는 나에게 싸움을 유도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여 둘은 아이들이 삥 둘러싼 가운데 치고 뒹굴었다. 집에서는 얼굴의 상처를 하교 길에 자전거에 부딪쳐 다친 것이라고 둘러댔다.

선생님은 아이들과 같이 교실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선생님이 젓가락으로 조그마한 입에 밥을 넣고 오물오물 씹는 모습은 어린 눈에도 그리 예뻤다.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점심시간은 반장 일당이 설치면서 맛있는 반찬을 징발해 가곤 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인지라 한가운데 매실장아찌 하나가 박힌 강냉이밥에다가 멸치볶음, 단무지, 갈치구이 같은 반찬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1990. 9. 28.(음 8. 10) 오후 10시 45분 향년 7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 8년 뒤 어머님도 따라가셨고 두 분이 함께 당신들이 태어나신 고향의 땅 함안의 백암(白岩) 선영에 안장되었다.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신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지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운명하시게 되는 그 무렵의 일들이 잊히지 않는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마지막 날까지 지극한 사랑을 베푸시었다. 돌아가시기 보름 전부터는 산소흡입에도 숨이 가빴다. 마지막인 듯이 겨우 겨우 “큰방 책상 오른쪽 아래 서랍에 우황청심환이 있다. 어머니한테 드려라”고 하시기도 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인 1990년 10월 23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재판사무감사 기념 / 앞줄 가운데가 필자다

일주일 전에는 의사로부터 아버지의 병세가 호전될 가망이 없다는 소견을 듣고 가족들이 모여 걱정을 하고 있었다. 큰 여동생은 며칠 전 아버지로부터 들은 꿈 이야기를 전했다. 저승에 간 친구들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여보게, 우리 사는 데로 가세. 살기 좋은 세상이라네.’ 그래서 아버지는 친구들을 따라 나섰는데 도중에 길을 잃고 그만 돌아오게 되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입을 떼실 기력이 없어 그렇지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그런 꿈을 꾸셨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세상을 하직할 날짜를 걱정하셨음이 틀림없다. 침대 발끝머리에 커다란 달력을 걸어두게 하셨고, 항상 9월의 하루 하루를 셈하고 계셨다. 나흘 전쯤부터는 다시 얼굴과 발끝에 부기가 오기 시작했고, 코에 끼운 호스로 죽을 부어 식도로 주입되게 하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갑자기 허리를 세워달라고 하여 달력을 유심히 보시더니 들릴 듯 말 듯 혼자소리로 사흘 뒤에 죽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느리에게 추석과 그 사흘 뒤의 할머니 제사에 쓸 햅쌀을 준비하라고 당부하시었다.

운명하신 날은 9. 28.(금) 밤이었는데, 장례일인 9. 30.(일)이후로는 10. 1. 국군의 날, 10. 2. 추석 전날, 10. 3. 추석 및 개천절, 10. 4. 추석 다음날, 이렇게 휴일이 겹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장례일과 삼우제날은 맑은 날씨에다가 도로가 붐비기는커녕 평일보다 더 한가로웠고 이 때문에 조문객들에 대한 미안함도 많이 덜었다. 가족들은 고인이 마지막까지 자손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셨다고 입을 모아 감복했다.

그 해 9. 9.자 중앙일보는 「사법부 새 수장 누가 될까」라는 제목으로 연말 정년퇴임하는 이일규(李一珪) 대법원장의 후임을 둘러싸고 벌써부터 법조계 안팎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면서, 법조계에서 거론되고 있는 후보로 최재호(崔在護), 김덕주(金德柱), 이회창(李會昌), 박우동(朴禹東) 대법관 등 4명과 조규광(曺圭光) 헌법재판소장, 김두현(金斗鉉) 전 대한변협 회장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후보자들에 대하여 신망이 두텁고 법원행정에 밝으며 성품이 강직하다는 등의 판에 박은 찬사와 함께 어떤 점이 변수가 되고 있고 어떤 면에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등으로 인물평을 하고 있었다. 나에 대하여서는 「민사소송 분야의 대가로 공부하는 대법관으로 유명」하다고 하면서 「솔직‧담백‧소탈한 성격으로 후배, 특히 소장법관들로부터 ‘적임자’란 평을 듣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가족들이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고 있던 어느 날 전주에 사는 누이동생이 길에서 우연히 사보았다고 하면서 9. 22.자 일요신문을 내밀고, 「누가 차기 대법원장 물망에 오르나」라는 전면기사에서 내가 후보에 끼어 있다고 법석을 떨었다. 그는 가느다란 호흡으로 연명하시는 아버지에게 “오빠가 다음 대법원장 후보에 올랐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좀 큰소리로 말했는데, 아버지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약간 끄떡 끄떡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너무 기대하실까봐 걱정이 되었다. 나는 신문이 그렇게 보도하지만 대법관 서열 순일뿐 나의 차례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큰 여동생이 “오빠는 나이가 적어서 이번에는 안 된답니다.”라고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그 주간신문은 일간지와 비슷한 후보군을 내세웠고, 제법 자세한 내용으로 인물평을 하고 있었다.

「박우동 대법관은 대법원내까지 팽배했던 권위주의의 청산을 주장하며 이회창 대법관과 마찬가지로 위헌심사권의 대법원 관할을 강조했던 선비풍 법관, ‘인신사고소송’, ‘주석민사소송법’ 등의 저서와 많은 논문들이 보여주듯이 민사소송의 이론가로 알려져 있으며, 민사소송법 중에서도 ‘상소심구조’에 깊은 연구를 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시 8회 가운데 줄곧 선두를 달려왔으나 대법관으로서의 입문은 동기생들에 비해 조금 늦은 편. 그러나 소장 법관들로부터 신망이 높고 88년 대법관 임명 시 ‘유임이 가장 유력하다’고 평가될 만큼 주위의 신망을 받아왔다. 또 88년 대법관 임명동의 득표수에서 현재 대법원장의 물망에 오르는 인물 중 최다 득표(280표)를 얻기도 했다.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고 올해로 56세를 맞은 그는 가정법원장 재직 시 최초로 민원안내실을 신설, 법원의 문턱을 낮추는데 기여하기도 했으며 ‘인공수정’을 주제로 한 모의재판을 주도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