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재판에서의 유무죄(有無罪) 판정은 별로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양형(量刑)의 기준이 문제일 것입니다. 비슷한 사건에 있어 어떤 판사는 징역 1년을 선고하는데 어떤 판사는 집행유예를 선고합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똑같은 사건은 없습니다. 요즘 선거법위반사건의 재판에 대하여 벌금 100만 원을 기준으로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보도를 봅니다. 어떤 이에 대하여서는 벌금 100만 원으로 당선이 무효가 되고 5년간 공직에도 참여할 수 없게 하였는데, 어떤 이에 대하여서는 벌금 90만 원을 선고하여 살판나게 합니다. 벌금 10만 원 사이에 법관의 재량이 그렇게 커야 합니까. 그러나 한편 법관은 벌금 100만 원도 선고할 수 있고 벌금 90만 원도 선고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어느 한쪽이 죽건 어느 한쪽이 살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법관의 양형에 대한 재량권(裁量權)은 아무도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면 당선인이 당해 선거에 있어 이 법에 규정된 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징역 또는 1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의 선고를 받은 때에는 그 당선을 무효로 한다고 규정한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 제 264조 자체가 조금 이상한 것뿐입니다. 벌금형 100만 원 이상이란 기준 때문에 법관에게 큰 고민을 안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벌금 1,000만 원 이상 정도라면 그런 고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100만 원이란 크지 않은 액수를 기준으로 할 바에야 그냥 벌금형이라고 해 버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벌금 90만 원, 벌금 70만 원 같은 양형이 나오게 되고 일반 사람들로서는 봐주기 재판이 아닌가 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것입니다.
법관의 재량이 아닌 검사의 재량에 속하는 일이라고 하면 다소 어폐(語弊)가 있겠지만,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제2조를 보면, 뇌물죄에 관하여 수뢰액이 5천만 원 이상인 때에는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 수뢰액이 1천만 원 이상 5천만 원 미만인 때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100만 원이 아닌 게 다행이지만 5천만 원의 선을 두고 어떻게 기소되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립니다. 4천 900만 원의 수뢰라면 집행유예의 형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5천만 원을 현금으로 받았는데 세어보니 만 원짜리 한 장이 비었더라고 고집을 피웠더라면 10년의 징역형이 아니라 작량감경되어 집행유예로 석방될 수도 있었는데 하고 후회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선거사건이나 형사사건 둘 다 법률조항 때문에 난리입니다.
하여간 형사재판에 있어서의 양형의 고민은 인간이 인간을 단죄하는 한 영원한 과제로 이어가게 될 것입니다. 법관은 소신(所信)을 발휘하는 의지가 굳어야 합니다. 불의(不義)를 배격하는 정의감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초임시절에는 재판장의 역할이 큰 만큼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때가 많지만 법관 하나하나의 정의를 향한 고집이 번져갈 때 사법부 전체를 결속하게 되고 결국 사회의 정의실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독재자의 불법과 비리 같은 것은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지나간 유신독재시절 우리는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민사재판의 경우 법관에게는 아시다시피 판례가 법령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합의(合議)할 때 보면 판례, 판례, 판례가 있는가 하는 것부터 챙깁니다. 풀어야 할 문제가 미묘할 때 그 점에 관하여 대법원의 선례가 없으면 금방 걱정부터 앞서게 됩니다. 그리고 판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한 채 이에 어긋난 판결이라도 하다가는 큰일입니다. 상급심에서 당장 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항소심 쯤 되면 판례는 신주 모시듯 하게 되고 무조건 따르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하며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심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법관의 역할에 대하여 회의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재야(在野)로 나와서 변호사를 해 보니까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판사가 판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고 꼭 과외선생님 말씀을 따르는 고3 수험생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직접 경험한 사건을 하나 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떤 소유권이전등기청구사건의 피고보조참가인 소송대리를 맡아 상고이유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사건은 상고이유를 받아들여 파기환송되었습니다. 그런데 판결을 송달받아 보니 좋다가 만 꼴이 되었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대법원의 판결이유는 이러했습니다. ⌜사실관계가 원심이 확정된 바와 같다면 이 사건 토지는 원고와 참가인을 조합원으로 하는 동 업체에서 매수한 것이라고 할 것이고, 따라서 원고와 참가인은 이 사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을 준합유하는 관계에 있고, 합유재산에 관한 소는 이른바 고유필요적 공동소송이라 할 것이므로, 위 매매계약에 기하여 소유권이전등기의 이행을 구하는 소를 제기하려면 원고와 참가인이 공동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할 것이다. 따라서 원고 한 사람만에 의하여 제기된 이 사건 소는 이 점에서 부적법하다고 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심이 이 사건 토지의 2분의 1 지분에 관한 소유권이전등기절차의 이행을 구하는 원고의 청구를 인용한 것은 결국 필요적 공동소송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 할 것이므로 이 점을 지적하는 논지는 이유 있다.⌟(1994. 10. 25. 선고93다54064판결).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대법원은 다른 상고이유에 대한 판단으로서 사실인정에 관한 문제까지 확정해 버린 것입니다. 즉 ⌜이 사건 토지는 참가인이 피고로부터 단독으로 매수한 것인데, 다만 계약을 함에 있어 원고와 소외 김형도의 명의를 빌린 것뿐이라는 소론 주장은 결국 원심의 전권사항인 사실인정을 헐뜯는 것에 귀착되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시한 것입니다. 상고심으로서는 원고의 주장을 바탕으로 소 각하(却下)의 파기자판(破棄自判)을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원심법원에 환송(還送)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리되고 보니 상고이유에서 사실인정에 관한 부분을 차라리 쓰지 아니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마는 그것은 소송요건에 관한 상고이유가 없을 때 예비적으로 쓴 것이어서 대법원이 그 점에 관하여 최종판단을 유보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환송심에서 사실관계를 다시 다투어 볼 여지가 있었는데 이제는 무위로 끝나게 될 위험이 커지고 말았습니다.
환송심인 서울고등법원은 대법원의 지적대로 제1심판결을 취소하고 이 사건 소를 각하한다는 소송판결(訴訟判決)을 내렸습니다. 즉, 이 사건 토지는 각 개인이 공동으로 매입한 것이 아니라 동업체에서 매수한 것이라 하여 대법원판결 그대로 소송요건을 결여한 부적법한 소라고 판시했습니다. 그런 판단밖에 할 수 없으므로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원고의 청구원인은 원고와 참가인 두 사람이 이득을 반분하기로 하는 동업약정을 했다는 것, 양자가 피고로부터 위 토지를 매수하였으므로 2분의 1지분은 동업약정에 따라 원고에게 귀속된다는 것, 따라서 매도인인 피고는 그에 관한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經了)하여 줄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 것인 만큼, 법원은 그 주장 자체로서 위와 같이 소를 각하하였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의 판시에 맹종(盲從)하여 증거에 의하여 본안(本案)의 사실관계를 모조리 인정하는 쓸데없는 뱀다리(사족:蛇足)의 판결이유를 쓰고 있었습니다. 바람을 바담하는 엉터리 스승을 따라 틀린 걸 알면서 바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뒤 원고는 다시 참가인을 피고로 하여 소를 제기하였습니다. 피고는 앞서의 소송에서 제출하지 못한 유력한 서증을 찾아내어 대응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재판부는 피고더러 화해를 권유하면서 사실관계는 이미 대법원에서 결판난 것 아니냐고 했고, 피고는 대법원의 그 부분판단은 기판력이 없지 않느냐고 항변했지만 들어주지 아니했습니다. 간단히 패소하고 말았습니다.
또 하나 기억되는 다른 사건에서도 고등법원은 관련사건의 대법원판결을 인용하여 이상한 판결을 한 것이었습니다. 즉 ⌜소외 조합으로부터 갑 앞으로 경료된 소유권이전등기가 화해의 실효에 의하여 원인무효로 된 이상 원고가 위 화해 이전에 갑에게 이 사건 토지에 관하여 조합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을 양도하였다고 하더라도 조합으로부터 이전된 갑 명의의 등기가 실체적 권리관계에 부합된다고 할 수 없다⌟는 판단입니다. 무슨 뜻인지 얼핏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화해의 실효(失效)에 의하여 원인무효가 되었기 때문에 등기의 실체적 권리관계의 부합여부의 문제가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판례(대법원 1974. 5. 28. 선고 74다314 판결, 1989. 9. 12. 선고 88다카71 판결)도 ⌜소유권이전등기가 원인 없이 이루어진 것이고 이 원인무효의 등기에 터 잡아 소유권이전등기가 마쳐진 것이라고 하여도 그 등기가 다른 사정에 의하여 실체관계에 부합하게 되는 것이라면 유효한 것이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앞의 고등법원판결은 원인무효의 등기라는 것과 실체관계의 부합이라는 개념이 마치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판시하면서 대법원 1993. 6. 29. 선고 92다56056 판결을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위 판결은 관련사건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이유부분에 그런 판단이 끼어 있어 놀랐습니다. 그리고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그 부분을 보면, 원인무효인 갑 명의의 등기가 실체적 권리관계에 부합하여 유효하다는 주장을 원심에서 한 바 없으므로 원심판결에 피고들의 주장을 오해한 위법이 있다는 상고논지는 이유 없다는 내용인데, 뒷부분에서 위의 판단과 비슷한 이상한 판시가 덧붙어 있었습니다. 하급심이 대법원판결에 충직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덮어놓고 그에 추종한다는 자세는 버려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