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아들에 대하여 큰 기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들이 판사가 되고 순조롭게 커 나가면서 대법원판사와 대법관을 연임한 것만 가지고도 대견히 여기셨을 것이 틀림없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3년이 지난 뒤 나는 공직자 재산공개파동으로 퇴임한 김덕주(金德柱) 대법원장 후임에 다시 거론되었고, 결국 김영삼(金永三) 정권의 대법원을 떠나면서 공무원직을 마감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경과를 잠깐 되살려볼까 한다.
1993. 7. 22. 나는 안우만(安又萬) 법원행정처장의 후임으로 발령이 나고, 8. 19. 신‧구 처장은 청와대에 가서 김영수(金榮秀) 민정수석비서관과 함께 오찬으로 칼국수를 대접받았다.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문제로 시끌벅적한 때라 언론에 간간이 보도되는 대법원장 소유의 부동산은 그분이 재야시절에 구입한 것이고 투기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취지의 해명을 했더니, 대통령은 조금도 걱정할 것 없다고 하면서 일국의 사법부수장이 그만한 일로 흔들려서야 될 일인가 하고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언약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언론의 연일 공세에 시달리다가 대법원장은 사표를 던져버렸고, 9. 11.에는 퇴임식이 거행되었다. 그때부터 슬슬 후임자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9. 19.자 신문들은 일제히 대법원장 낙점이 예상밖으로 장고(長考)에 들어가고 있다면서 후보들의 추측기사를 띄우고 있었는데 나에 대한 부분만 대강 보면 이렇다.
조선일보 「이런 차원에서 박우동 대법관도 거론된다. 그는 대법관 서열 2위이자 PK인맥이다. 그가 올라가면 사법부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부산출신이 부담된다. 신임 김도언(金道彦) 검찰총장도 부산출신인데 사법부 수장마저 부산출신이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김 대통령은 새 정부의 향후 국정운용기조 개혁의 차질 없는 추진이란 큰 틀 안에서 대법원장을 고를 것 같다.」
경향신문 「이 중 박우동 행정처장은 청렴성과 법원 내의 신망, 행정능력 겸비 등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PK출신(함안-부산고)이어서 검찰총장마저 PK출신이 임명된 상황에서 지역 문제상 불리할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한겨레신문 「이회창 감사원장과 고시동기인 박우동(59) 대법관도 대법원장 물망에 오르고 있다. 지난 7월 법원행정처장에 임명된 박 대법관을 익히 아는 판사들은 그를 소탈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개혁성’이 강한 외유내강형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부산 동래고 출신인 김도언 검찰총장과 함께 부산고 출신인 박 대법관이 대법원장에 임명될 경우 결과적으로 법조 3륜 중 2륜의 수장이 모두 피케이(부산 경남)이라는 점이 경기고 출신인 이회창(李會昌) 감사원장과 광주고 출신인 윤 관(尹 館) 대법관보다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중앙일보(9. 20자) 「신임 대법원장 후보는 이회창 감사원장과 윤 관 대법관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우동 법원행정처장도 한때 거명됐으나 부산고 출신의 PK고, 검찰총장도 부산출신임을 고려할 때 여론을 의식해서라도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9. 23. 윤관 대법관이 새 대법원장으로 지명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변호사를 하게 되고 그동안 6년의 대법원장 임기가 흘러갔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또 한 번 후임 대법원장의 물망에 오르게 되는데 그 경위도 한번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대한변호사협회 김창국(金昌國) 회장은 회장 취임당시의 공약대로 사법평가위원회를 구성하고, 1999년 9월로 임기가 끝나는 대법원장의 후임자를 추천하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이일규(李一珪) 위원장을 비롯하여 15명의 위원 가운데 나도 끼어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해 4월 하순경부터 이에 대한 찬반양론이 무성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찬성론자는 법조인들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변호사집단이 후보를 추천하는데 대하여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고 심사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다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했고, 반대론자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에 대하여 외부기관이 간섭하는 것이 되어 사법부독립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나중에는 대법원이 「이익단체에 불과한 변협이 대법원장을 추천하겠다는 것은 사법부가 이익단체로부터 독립되어야 하는 헌법상 원칙을 정면으로 위협하는 것」이라는 보도자료를 냈고, 변협은 이에 맞서 「법조인을 가장 잘 아는 변호사 단체의 검증을 거쳐 임명된 대법원장은 스스로 권위를 갖추게 돼 사법권 독립에 오히려 기여할 것」이라며, 「미국과 일본도 연방법관과 최고재판소 재판관 지명 때 변호사단체의 의견을 묻고 있다」고 하는 성명을 냈다.
헌법 제104조 제1항은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변협의 대법원장 추천은 법적 근거가 없다. 따라서 변협회장이 비공개로 몇 사람의 후보자를 검증하고 그 가운데 두 사람의 후보를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 추천한다고 해도 대통령이 변협의 의견을 적임자 임명의 참고자료로 쓸 것인가, 아예 무시해버릴 것인가 하는 것은 대통령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나는 사법평가위원회의 위원으로서 후보추천절차에 처음부터 관여하여 자초지종을 잘 알지만 내용에 대하여 아주 비밀에 부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끝까지 함구하고 있었다. 더욱이 위원들의 투표결과 내가 선두후보로 오르게 되어 나 자신 다른 사람에게 투표했는데도 쑥스러웠고, 며칠 뒤 위원직을 사퇴하는 것이 모양상 좋겠다고 해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비밀이란 오래가지 않는 법인가, 그해 8. 10. 전후해서 도하의 각 신문은 후임 대법원장 인선을 둘러싼 법조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고 크게 보도하면서 구체적인 추천후보 명단을 공개했다. 조선일보는 변협은 8. 9. 정밀심사작업을 벌여온 6명의 후보 중 2~3명을 선발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추천할 예정이었으나 사법평가위원회 회의를 1주일 연기하고 오는 8. 16. 추천할 것이라고 밝혔다면서, 6명의 추천 후보는 정귀호(鄭貴鎬), 이용훈(李容勳) 대법관과 김용준(金容俊) 헌법재판소장, 최종영(崔鍾泳), 윤영철(尹永哲), 박우동(朴禹東) 전 대법관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이어 8. 24.자 조선일보는 대한변협이 지난 16일 비공개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추천의견서를 보낸 차기 대법원장 후보는 재야 변호사인 박우동(65), 윤영철(62), 최종영(60) 전 대법관 등 3명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9. 16. 대통령은 최종영(崔鍾泳) 전 대법관을 대법원장에 지명했다. 함안군 향우회 이정환(李正煥) 회장은 “대한변협에서 적격자라고 판단한 것이야말로 검증된 객관성 있는 인물평가 아니겠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우리 함안의 자랑입니다.”라고 하셨다. 좋은 일 있을 때마다 멋진 축하를 전해주시는 부산의 조유로(曺有路) 시인은 법원행정처장의 발령소식을 듣고 ‘이제, 축전 한 장 남았습니다.’란 전보를 보내온 바 있었다. 그런데 결국 나머지 한 장의 축전은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열 번 백 번 그 성원의 전보를 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