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 나는 이화여자대학교 법과대학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여성과 법조」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기념강연을 한 바 있다. 신인령(辛仁羚) 학장의 주문을 쾌히 받아들인 것인데 그것은 대학에 지고 있는 빚을 갚는다는 심사가 작용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1995년 어느 날 평소 잘 아는 사회과학대학의 한인숙(韓仁淑) 교수(당시 법정대학장)가 나의 사무실로 찾아와 석좌교수(碩座敎授)직을 제의했는데, 당시 나는 변호사업무가 한가하지 않았으므로 바쁘다는 핑계를 대었다가 다시 남을 지도할 역량이 모자란다고 이유를 달아 간곡히 사양했으나, 이미 내정된 일이니 고집을 풀어달라는 간청을 마음 약한 나로서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해 새학기부터 법과대학에서 민사법에 관한 강의를 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4학기에 걸쳐 힘들었지만 유익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법과대학의 많은 교수와 대학원 학생들이 도와주어 내 공부도 하면서 이화인(梨花人)이 되어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이런 빚을 지고 있는데 어찌 이화인의 청을 거절하겠는가.
그런데 당장 「여성」에 대하여 적어도 법률적인 방향에서라도 뭔가 알고 싶어 책장에서 윤후정(尹厚淨) 전 총장의 「여성의 인간화를 위하여」(1997)라는 논문집을 꺼냈다. 몇 년 전 그 분의 교수정년퇴임을 기념하는 모임에 참석하여 가지고 온 책인데 먼 뒷날 읽어보게 된 것이지만 진한 감동을 느꼈다. 어떤 이로부터 저작물을 기증 받으면 무슨 책이든 간에 참 반갑다.
특히 저자의 서명이 들어 있으면 소중하게 보관하고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반가운 책이지만 금방 읽는 일은 별로 없다. 좀 한가한 시간이 날 때 또는 필요한 일이 생길 때 천천히 볼 양으로 서가에 꽂아둔다. 전문서적인 경우는 대개 그렇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세월이 몇 년 흐르도록 겨우 서문 정도만 읽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때는 저자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앞서고 내용이 좋으면 게으름을 속죄하는 마음까지 생긴다.
위의 책을 보면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불리한 대우를 받는 일이 없는 오늘이 있게 되기까지의 법률가들에 의한 위대한 여성운동사를 한 눈에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책에는 바로 우리 어머니, 할머니가 엊그제까지 서럽도록 겪어 오신 여성으로서의 굴욕과 고통이 그려져 있다.
「남자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정의와 가치관은,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열등하게 태어났다는 사고방식을 천부화하여 남성의 신분은 선천적으로 존엄하고 우월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우월한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이리하여 우남비녀사상(優男卑女思想)은 여성에게 개체로서의 독립된 인격을 부정하여 삼종지도‧칠거지악의 가치관과 수절과 순종의 윤리관 아래 독립적 실존성을 부인하였다. 여성을 철저히 종속적 존재로 인식한 가치관은 남녀에게 별도로 타당한 윤리관을 세워 여성은 불견(不見)‧불문(不聞)‧불언(不言)으로 무조건 남성에게 복종케 하고, 남성은 천부적으로 강하고 지성적이고 지배적인 기질을 가진데 반하여 여성은 유약하고 피동적이고 순화적이어서 정숙‧인고‧희생의 성품이 그 특질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부녀자는 유한정정(幽閑靜貞)이 지고의 부덕이며 이러한 부덕의 유지를 위하여 외출을 엄격히 규제하여 쓰개치마를 쓰고 나들이를 해야만 했다. 여성은 이와 같이 열등하고 종속적인 존재이므로 아버지‧남편‧아들에게 의존하여 일생을 사는 것으로 족하고, 세상살이‧인간사를 경영하는 일은 남자들에게 맡기고 다만 아이를 기르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는 일만이 여성의 가당한 역할이라 여겨 결국 여성은 ‘내조자‧보조자’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능을 천직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식이나 교육은 불필요하며, 오히려 여자의 재주는 ‘집안 망친다. 무재주 상팔자’ 등의 속담 속에 억눌려 왔다.」(52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태어날 때부터 아들의 출생 때는 유산경기부정(有産慶忌不精), 딸의 출생 때는 유산고기부정(有産苦忌不精)이라 써 붙이고 아이를 눕히는 침상마저 차별하였으며, 도처에 부귀다남(富貴多男)이 새겨진 환경 속에서 여자아이는 자라야 했다」(54면)는 이야기를 처음 들을지 모른다. 몇 줄만 더 소개하기로 한다.
「우리 조상들은 남자는 하늘이요, 기둥이라 가르쳐 왔고, 우리 어머니들은 출산 마당에서 고추냐 보리냐를 초조히 기다리다가 고추라고 하면 삼신상을 차려 33천에 큰 절 서른 세 번으로 제배를 올리고, 경사가 났으니 부정을 삼가 달라는 뜻에서 유산경기부정이라는 첩지를 써 붙이는 습속에 반하여, 딸을 낳았을 때 산모는 첫 미역국을 들여다 주면 먹을 염치가 없다는 뜻으로 퇴반을 해야 함이 가문 있는 집 딸 시집갈 때 가르쳐 주는 법도였다고 한다.」(127면)
우리는 어머니의 아들로서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손자, 증손자로서 여성의 역사와 현실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을 기울여 보았는가 이런 물음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제는 여성에게 남녀차별, 성에 관한 가치판단을 기초로 하는 차별대우는 허용되지 아니한다. 오직 남녀의 사실적(생리적) 차이에 의거한 차별 또는 합리적 이유가 있는 차별만이 허용될 뿐이다. 다만 오랜 세월의 권위주의적 가부장권제(家父長權制)의 사회구조 속에서 「인내와 희생」에 젖어온 우리 어머니들에게 아직은 성차별을 전제로 한 가치관과 불균등한 제도의 잔재가 남아 있지만 서서히 그것도 걷혀가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 기회에 새삼스럽지만 남녀평등과 여성의 지위 및 권익에 관한 헌법(憲法)과 법률(法律)의 규정들을 한번 살펴보자. 헌법 제1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고 있고, 제32조 제4항은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했고, 제34조 제3항은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제36조 제1항, 제2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했다.
헌법의 위와 같은 보장은 몇 개의 획기적인 법률을 탄생시켰다. 모자보건법(1986. 5. 10.) 제3조 제1항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모성과 영유아의 건강을 유지‧증진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했고, 여성발전기본법(1995. 12. 30)은 제5조에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남녀평등의 촉진, 여성의 사회참여확대 및 복지증진을 위하여 필요한 법적‧제도적 장치의 마련과 이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할 책무를 진다」고 했고, 여성기업지원에관한법률(1999. 2. 5) 제10조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기업에 대한 자금을 지원함에 있어 여성기업의 활동과 창업을 촉진하기 위하여 여성기업을 우대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1999. 2. 8) 제1조는 「이 법은 헌법의 남녀평등 이념에 따라 고용, 교육, 재화‧시설‧용역 등의 제공 및 이용, 법과 정책의 집행에 있어서 남녀차별을 금지하고 이로 인한 피해자의 권익을 구제함으로써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남녀평등을 실현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또한 보건의료기본법(2000. 1. 12) 제32조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건강한 자녀의 출산‧양육의 지원 등 여성과 어린이의 건강을 보호‧증진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책을 강구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했고, 남녀고용평등법(2001. 8. 4) 제4조 제3항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이 법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민의 관심과 이해를 증진시키고 여성의 직업능력개발 및 고용촉진을 지원하여야 하며, 남녀고용평등의 실현을 저해하는 모든 요인을 해소하기 위하여 필요한 노력을 하여야 한다」고 규정했으며, 여성농어업인육성법(2001. 12. 31) 제3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여성농어업인의 능력개발과 지위향상 및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종합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필요한 재정지원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2001. 8. 14. 근로기준법 제72조가 개정되어 사용자는 임신 중의 여성에 대하여 산전후를 통하여 60일이던 보호휴가를 90일로 확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