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남성으로부터 핍박받아 온 여성이 어느덧 과거의 사슬을 끊고 우뚝우뚝 남성을 따라 잡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각종 시험에서 여성의 성적이 남성을 추월하기 시작한다고 해서 여성의 세력이 남성의 세계를 정복한다고 기대할 수 없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많은 영리한 여성은 안방에서 남편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신학자 토마스 프라는 아내는 남편에게 끊임없이 복종함으로써 남편을 지배한다고 했고,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는 여자는 선량한 남편을 만들어내는 천재라고 했다. 젊은 여성은 현명하고 선량하고 아름다워야 하며, 어머니는 헌신적이면서 자애로워야 한다. 여성의 강점(强點)은 여기서 나온다. 여성이 오만과 욕망에 사로잡혀 외향적이고 공격적인 성질의 남성을 본 따고자 하는 것은 현명한 짓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여성의 평등과 권익향상을 위한 힘찬 질주를 찬양하고 존경하면서 근래에 있은 두어 가지 사태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종중(宗中)에 맞선 여성 후손들의 소송에 관한 것이다. 2001년 3월경의 신문 보도를 보면 결혼한 여성들이 종중을 상대로 종중원 지위확인과 종중재산의 분배를 받을 권리를 요구하며 민사소송을 제기했는데 잇따라 패소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송은 경기도 용인 수지 일대의 땅값이 신도시 개발정책에 따라 껑충 뛰자 남자 종원들이 여자들을 따돌리고 부동산 매각대금을 나눠 가진데서 발단했다.
판례는 종중에 대하여 「공동선조의 분묘수호와 제사 및 종중원 상호간의 친목 등을 목적으로 하는 자연발생적인 관습상의 종족집단체」이고, 따라서 특별한 조직행위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고, 공동선조의 후손 중 성년 이상의 남자는 당연히 그 구성원(종원)이 되는 것이라고 하는 태도(대법원 1991. 10. 11. 선고 91다24663 판결, 최근의 것으로는 2002. 5. 10. 선고 2002다4863 판결)를 굳히고 있다. 이러한 판례가 바뀌지 않는 한 여성은 종원의 자격을 내세울 수 없을 것이고 종원의 자격이 있음을 전제로 종중재산의 처분에 관여할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여성의 입장에서 종중의 위와 같은 조치를 궁극적으로 시정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판례를 변경하여 여자도 후손이면 종중원에서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 하는데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종중이 성년 남자후손으로 구성된 관습상의 종족집단체라는 것이지만 시대가 바뀌었으므로 관습상의 단체의 의미도 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먼저 종중들이 하나하나 규약을 바꾸어 성인남자 아닌 성인남녀를 구성원으로 한다고 하기만 하면 법원이 이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런 과정을 거친다면 지금까지의 판례는 수정되어질 것이다.
여태껏 관심이 없다가 부동산 수용보상금이 분배되니까 물질적인 욕심에서 종중원으로서의 권리를 부르짖는 모양새가 좀 그렇기는 하나, 종중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한 것은 누구이며, 결혼한 딸을 친정에서 남이라고 쫓은 것은 누구였던가. 딸은 후손도 아니란 말인가 하는 물음에 아니라고 답할 사람이 있겠는가.
종중이라는 실체가 지금까지 봉제사(奉祭祀)외에 표면상 무슨 행사를 하는 일은 많은 기금이 적립되어 있는 일부 대종중을 제외하고는 별로 찾기 어렵다. 남자들만 모여 회의를 하고 여자들의 시중으로 제사를 지내고 식사하는 것으로 끝날 뿐이지 여성들에게 어떤 관심도 갖게 하지 않았다. 남자가 없는 가정은 철저히 배제되는 것이었고 이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종원들에게만 거액의 종중재산 처분대금이 분배되고 있었다. 여자만 있는 집안은 종원이 없기 때문에 그 분배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여성이 보고만 있겠는가. 이래서 법원에 제소하여 몸부림을 쳐본 것이다. 예전 같으면 출가외인(出嫁外人)인 딸들이 종중재산을 넘보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전통사회에서는 아들을 낳지 못하면 양자를 들여서라도 아들에서 아들로 가문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아들이 없다고 양자를 들이는 세상이 아니다. 더욱이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만 낳아 기르는 가정이 늘고 있다. 이래서 종중의 구성원에 관한 옛 관습은 천천히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의 민사소송에서 비록 패소했다고 하더라도 종중에 있어서의 여성의 배제가 과연 정당한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만 해도 큰 소득이라 할 수 있고, 장차 규약변경에 관하여 종중을 설득하는데도 유리한 영향을 끼칠 것이 틀림없다.
2002년 11월 어느 날의 신문은 전주 이씨 최대계파로 남자 후손들만 50만 명에 달하는 효령대군파 종친회가 여자 후손들도 족보(族譜)에 등재키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이것도 시대변화와 더불어 여성들의 집요한 노력이 올린 결실의 하나일 것이다.
다만 하나 씁쓰레한 것은 종중의 재산분배라는 행위다. 어떤 연유에서든 종중소유의 부동산이 대규모로 처분되고 그 대가를 종원들끼리 나눠 가진다고 하는 것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이 아닌가 싶다. 종중에 관하여 그 구성원을 성년남자로 하는 관습을 인정한 것도 종중재산을 종원들에게 분배한다는 일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중의 중요한 역할이란 같은 시조를 둔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묘역을 관리하며, 종중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는데 있는 것이고, 가령 핵심 종중재산을 처분하여 그 대가를 분배한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종중의 실질적인 해체에 다름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종중의 재산분배란 그 규모나 방법을 막론하고 끝내는 종중원들에게 종중에 대한 전통적인 역할에 대한 회의를 일으키게 하고 종중에 대한 애착을 엷게 하는 부작용을 낳게 할 수도 있지 않나 걱정된다.
박주현(朴珠賢) 변호사는 「딸들은 종중과 관계가 없고 종중재산에 대해서도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판결에 대해서 자라나는 우리의 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가문이니 족보니 제사니 종중이니 하는 전통적인 제도들 전체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될 것 같다. 계약적인 사고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은 전통이 나를 인간취급하지 않으니 나도 전통을 쓰레기 취급하겠다는 발상을 자연스레 하게 될 것이다」(문화일보 2001. 3. 29)라고 했다.
2002년 8월 어느 날의 신문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부와 여성불허의 가부장 전통을 고수하는 유림(儒林)간에 「화해의 악수」가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한명숙(韓明淑) 여성부장관은 지난 7. 26 도산서원이 4백 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여성들에게 알묘(謁廟)의 기회를 허락한데 대해 감사의 편지를 전했다는 것이다.
한 장관은 이 편지에 과거 우리 역사의 남녀평등 사례를 조목조목 적었는데, 「과거 역사를 돌이켜보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초기까지 아들, 딸, 사위뿐만 아니라 친손, 외손까지 조상에 대한 제를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우리의 전통이 변모하여 제례를 행함에 있어 여성들의 역할이 축소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하면서, 「이번에 선구자적으로 유학의 본산인 도산서원에서 여성들에게 퇴계선생의 사당을 참배할 수 있도록 개방하신 것은 우리 유학의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유학의 역사를 새로이 쓰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매우 신선한 뉴스가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