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원고로서 민사상의 청구를 하여 패소했을 때 사기의 미수죄로 처벌하는 사례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판례(대법원 2002. 6. 28. 선고 2001도1610판결, 2002. 12. 10. 선고 2002도5190판결)는 일관하여 「소송사기는 법원을 기망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음으로써 상대방의 재물 또는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범죄로서, 이를 처벌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누구든지 자기에게 유리한 주장을 하고 소송을 통하여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민사재판제도의 위축을 가져올 수밖에 없으므로, 피고인이 그 범행을 인정한 경우 외에는 그 소송상의 주장이 사실과 다름이 객관적으로 명백하거나 피고인이 그 소송상의 주장이 명백히 허위인 것을 인식하였거나 증거를 조작하려고 한 흔적이 있는 등의 경우 외에는 이를 쉽사리 유죄로 인정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는데, 지극히 당연한 이론일 것이다.
원고가 재산상의 청구권이 있다고 해서 소송제도를 이용하여 소권(訴權)을 행사했는데, 무슨 이유로서건 패소했다 하여 법원을 기망하려 한 범죄가 된다고 하는 것은 쉽사리 수긍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서양의 격언에도 소송의 제기는 불법행위가 되는 일이 없다(the process of the law does no injury)라는 말이 있다. 피고가 행여 재판에 출석하지 아니하고 아무 대응도 하지 아니할 것을 요행으로 기대하여 승소의 확정판결을 받아 재산상의 이득을 취하기로 마음먹고 소장을 제출한 원고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원고는 피고와 법정에서 정정당당히 공방(攻防)을 하여 승소판결을 받겠다는 결의 끝에 소를 제기하는 것일 테다. 원고가 그 주장을 관철할 만한 증빙자료가 다소 박약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소송을 제기하여 권리행사를 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그래서 3심에 이르기까지 싸워보는 것이다. 그리고서 끝내 패소하고 마는 수가 있다. 그러면 이게 사기의 미수가 된다는 말인가. 참으로 위험한 단정이다.
그리하여 원고가 피고에 대하여 전혀 채권이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위의 내용으로 소를 제기하여 피고가 이에 응소함으로써 사기의 미수가 되었다고 인정한 원심판결을 파기한 사례(최근의 것만 해도 대법원 1997. 7. 22. 선고 96도2422 판결, 1998. 9. 8. 선고 98도1949 판결, 2003. 2. 11. 선고 2002도6851 판결)가 더러 있다. 대법원 1992. 2. 25. 선고 91도2666 판결은 「제1심과 원심이 고소인의 불충분한 진술만을 믿어 이 사건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한 것은 마치 민사재판에서 그 주장사실이 인정되지 아니하여 패소한 원고는 모두 소송사기죄에 해당한다는 식의 확대적용에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건을 맡아 상고심에서 열심히 겨루어 보았지만 실패하고만 일이 있다. 그 이야기다. 피고인은 4년여에 걸친 민사재판에서 패소한 뒤 사기미수죄로 고소를 당하여 제1심(서울지방법원 1997. 6. 27. 선고 94고단303 판결)에서 얼마나 밉보였던지 징역 1년 6월의 실형이 선고되었고, 항소심(서울지방법원 1998. 7. 28. 선고 97노5418 판결)에서 양형부당의 이유로 간신히 2년간 집행유예의 선고를 받았다.
피고인은 갑을 상대로 문제의 임야 3만 평에 대한 명의신탁해제를 원인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구했는데, 상고심까지 가서 패소로 확정(1996. 11. 29. 선고 95다46210 판결)된 뒤 허위의 사실로 재판부를 기망하여 승소판결을 받아 위 임야를 편취하려 했으나 소송에서 패소함으로써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수에 그쳤다는 공소사실이 인정되어 위와 같이 무거운 형이 선고되었던 것이다. 위 임야는 피고인이 실질적으로 매수하여 갑에게 명의신탁한 것이 명백한데 명의신탁사실에 대한 입증부족으로 패소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임야를 갑이 매수했다는 점에 대하여 명백한 증거가 없어 소송사기가 성립될 수 없다는 내용의 항소이유도 배척되었던 것이다. 나는 상고이유서를 쓰게 되었다.
여기서 장황하게 상고이유를 소개할 필요는 없고 그 서두만 보면 이렇다. 「법원을 기망하여 유리한 판결을 얻고 이에 기하여 상대방으로부터 재물 혹은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는 행위에 대하여 판례는 이를 소송사기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소송제도를 이용한 허위의 주장이 기망일 수 없고 패소자의 재판에 대한 복종이 재물의 교부라고 할 수 없으므로 소송사기는 일반의 사기와는 범죄유형이 다르다고 하는 학설도 있으나 판례를 지지하는 것이 통설임은 주지하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법원을 기망하여 제3자의 재물을 편취하는 행위라 하여 소송사기죄로 인정하는 것은 민사재판에서 유리한 주장을 하여 권리구제를 받으려는 민사소송제도와 상치될 가능성이 큽니다. 형식적 진실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민사소송제도 아래서는 법원은 착오에 빠졌는지 여부를 떠나 당사자의 주장(허위라고 인정되더라도)에 구속되어 재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이와 같은 소송제도를 이용하는 것이 사기의 수단으로 볼 수 없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있고, 또 형식적 진실주의 내지 변론주의를 강조하다보면 법원이 기망에 의하여 착오에 빠진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며, 자칫하면 민사소송에서 원고로서의 주장사실이 인정되지 아니하여 패소할 때 모두 소송사기미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판례도 그 적용에 있어 엄격 해석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고이유는 이어 형사항소심의 유죄판결은 피고인의 주장 가운데 자질구레한 부분을 들어 일관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기는 하나, 요컨대 고소인 측 증인의 진술은 채택하고 피고인 측의 모든 자료는 믿지 아니한다는 것이고, 신빙하고 아니하고가 법원의 재량인 이상 결국 패소한 당사자는 거짓말을 꾸민 것이 되고 승소한 당사자는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여 올바른 판단을 이끌어낸 꼴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그 위에 패자가 사기미수라는 덤터기를 쓰게 된다면 억울하기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라는 것이므로, 판례가 소송사기죄를 인정하는데 있어서는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고 한 것도 민사재판의 귀추에 의존하여 가볍게 유무죄를 판단하는 위험을 경고하는 것에 다름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민사재판에 있어서는 결국 어느 쪽인가를 판정해서 한쪽의 손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고, 판결에 있어서의 무승부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권리를 내세워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패소하고 마는 당사자는 있기 마련입니다. 민사재판의 생리가 이럴진대 거기에 소송사기미수죄를 적용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습니까. 부동산의 명의신탁여부를 둘러싸고 일어난 분쟁에서 끝내 패소한 부동산등기명의자에게 횡령죄를 의율(擬律)할 수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정말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기면 영웅이고 지면 역적이 되는 형상은 민사소송제도를 이용하여 재산적 분쟁을 해결하려는 당사자에게 함부로 적용할 것이 아니며 그것은 너무도 불합리하고 가혹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사기미수죄의 성립에 있어서의 토대가 된 민사재판의 내용을 보면, 결코 피고인이 법원을 기망하여 민사재판에서의 상대방의 재물을 편취할 것을 기도한 범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고인의 소송상 주장 자체에서 사실과 다른 것임이 객관적으로 명백한 것도 아니며, 증거를 조작하려고 한 흔적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민사소송에서 상대방 측의 증인을 채택하고 피고인 측의 증거를 믿지 아니한 때문에 패소되었던 것 뿐입니다. 결국 피고인이 그 청구원인사실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한 나머지 원고의 청구가 기각된 판결을 받게 된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사실 민사사건의 상고심판결에 의하더라도, 「원심이 원고가 은행으로부터 금전을 대출받아 임야를 매수하여 피고에게 그 명의를 신탁하였다는 원고의 주장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들은 거시증거에 의하여 인정되는 여러 가지 정황사실에 비추어 믿기 어렵다고 하면서 원고의 주장을 배척하였는 바, 기록에 의하여 살펴보면 원심의 이러한 인정판단은 그 판시의 여러 가지 정황사실(간접사실)을 인정함에 있어서 다소 잘못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결론에 있어서 정당한 것으로 수긍이 가고, 소론과 같은 채증법칙 위반의 잘못을 저지른 위법이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어서, 피고인이 입증부족으로 가까스로 패소한 것일 뿐 법원을 기망할 의도가 있었다고 볼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항변할 만했다.
대법원 2000. 11. 24. 선고 98도2655 판결은 「원심은 그 판시와 같은 사실을 들어 이 사건 부동산은 갑이 매수한 것이고 피고인이 명의신탁한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피고인이 민사소송에서 증거를 조작하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고 판단하여 이 사건 소송사기 미수의 범죄사실을 유죄로 인정한 제1심판결을 유지하고 있는 바, 제1심이 적법하게 채택한 증거들을 기록에 대조하여 보면,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고, 거기에 상고이유에서 지적하는 채증법칙을 위반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거나 법리오해 등의 위법이 있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상고를 기각했다.
피고인은 민사재판에서 패소하고 억울하여 분을 삭이고 있는 것은 뒷전이고 형사사건이나마 허물을 벗자고 한 것인데 만ㄴ사 실패하고 만 것이다. 당사자에게 할 말이란 상고심은 여간해서 원심판결을 깨려들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원심판결이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했다면 대법원은 유죄를 주장하는 검사의 상고를 이유 없다고 기각했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 하나마나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변호사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이야기도 되고, 상고심을 원망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되겠는데 의뢰인에게는 눈곱만치도 위안이 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