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성화된 조정
1990. 9. 1. 민사조정법이 제정된 이후 대법원의 홍보와 활성화를 위한 지침이 마련되면서 조정제도(調停制度)가 점차 민사분쟁해결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조정은 법관이나 조정위원회가 개입되어 당사자의 합의를 이끄는 절차인데, 소송에 비하여 비용이 저렴하게 들고 간이‧신속하게 처리되는 특징을 가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정의 큰 장점은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분쟁해결의 원만성과 타당성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법원까지 끌고 온 당사자의 다툼을 판결이라는 형식으로 흑백을 가리기보다 되도록 당사자끼리 이야기를 맞추어 해결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가치 있는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해결책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처리될 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주장으로 보아 중간적인 선에서 낙착되는 것이 통례이고 쌍방 큰 불만이 없는 선에서 양보하는 셈이므로 비교적 후유증이 없는 깨끗한 치유책(治癒策)임이 틀림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쟁은 재판에 의하건 재판 외의 방법에 의하건 어떤 형태로서도 해결점을 찾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분쟁의 주인공들로서는 되도록 신속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해결되는 방책을 모색하는 것이 현명하다. 만일 오래 끌어온 분규(紛糾)를 조정이나 화해로 처리할 의사를 갖게 되고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결론을 내리게 되면 그만치 분쟁당사자에게는 판결에 의한 일도양단적인 해결에 의한 것보다 경제적 피해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상으로도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민사판례연구회가 개최한 1991년 7월 하계심포지엄(민사판례연구 14집)에서 송상현(宋相現) 교수와 허 만(許 樠) 부장판사는 소송에 갈음하는 분쟁해결방안(ADR)에 관하여 미국의 예를 들면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거니와, 최근 사법제도개혁의론에 관한 일본의 문헌을 보니 국민에 대하여 매력적인 분쟁해결 메뉴를 많이 제시하는 ADR기관이 민간에 의하여 설립되고 서로 경합하거나 보완하면서 분쟁을 해결해가는 방향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분쟁이 생기면 무조건 소송으로 해결하고자 하고, 재판에 의한 해결도 최종심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데다가 대법원에서조차 패소하면 헌법재판소에 제소할 방법이 있는지를 묻는 현상을 흔히 보게 된다. 그러니 법관의 과중한 업무로 귀결되고 그것은 또한 재판의 지연과 판결의 질과도 연계되어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저하라는 위험한 사태까지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사법운영에 있어서 소송에 갈음한 분쟁해결방안을 강구하는데 신경을 써야할 때가 왔기 때문에 근래 법원이 조정제도의 활성화를 위하여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매우 고무적(鼓舞的)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정을 성공시키자면 조정담당법관이나 조정위원회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분쟁당사자는 누구도 먼저 양보의 선을 제시하는데 주저한다. 그것은 얼핏 상대방과 법원에 대하여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는 모습으로 보이게 될 위험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조정은 시발부터 어려운 것이고 고비 고비 난관이 깔려 있다. 말 한마디 조그마한 꼬투리를 잡아 끝에 가서 벼랑으로 치닫게 하는 수도 있다.
당사자의 지위와 성격을 보아가면서 조심조심 설득해 나가야 할 것이지만 때로는 적당한 위협과 엄포도 필요할 때가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분쟁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 해결방안을 어느 구석에서 찾으면 효과적일 것인가를 미리 염두에 두고 들어가야 효험이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역습을 당하여 낭패를 볼 위험도 있다.
법원이 조정의 성공률이라는 통계에 집착하는 것인지 좀 심하게 조정을 이끌어내는 경우도 있는데 당사자에게 불만이 남을 수 있는 조정은 피해야 한다. 얼마 전 서울지방법원 단독판사로부터 경험한 사례 하나를 들어보겠다.
원고 세 사람이 변호사도 없이 피고회사를 걸어 각각 3천만 원 또는 2천만 원 내외의 건물신축공사대금을 청구하는 소를 제기했다. 피고회사의 주장은 원고들과는 공사에 관하여 무슨 계약을 체결한 일도 없거니와 공사기성대금은 원래의 수급인인 계약자 본인에게 모두 지급했다는 것이었다. 원고들은 소송도중 주장을 바꾸어 공사계약을 한 사실은 없으나 해방을 감춘 수급인의 지시에 따라 공사를 했고, 최근 피고 대표이사가 원고들의 딱한 사정을 감안하여 공사대금 일부를 직접 부담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우기고 그에 관한 증인도 내세웠다. 피고회사의 사장은 당사자본인의 자격으로 법정에 나와 원고들의 주장과 같은 약속을 한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사장이 진술을 마치고 증인석을 떠나려는 순간 판사는 어느 정도의 선에서 타협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화해를 종용했다. 사장은 공사대금을 이중으로 부담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가볍게 불응했더니 판사는 거듭 사장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설득의 도가 하도 집요해서 나중에는 판사의 입장을 살려주지 않으면 무슨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기기까지 했다. 변호사와 상의해서 결정하겠노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그 자리에서 확답을 하라고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원고들이 요구하는 대금의 40% 정도를 부담하기로 하는 조정이 성립되었는데, 덧붙여 원고 세 사람 외에 법정에 출석해 있던 다른 세 사람의 업자도 조정참가인(調停參加人)으로 가담케 하여 그들에게도 각각 2백만 원 내외의 돈을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이들 참가인은 원고들과 마찬가지로 본래의 수급업자로부터 공사일부를 하청받았으나 공사대금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서 소문을 듣고 방청을 나온 참이었는데 손도 안대고 코푼 격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판사는 회사의 돈으로 고루고루 자선을 베푼 셈이었다.
나중에 송달되어 온 조서의 조정조항(調停條項)부터 보았더니 한 달 후까지 돈을 지급하되 지체할 경우에는 연 25%의 비율에 의한 지연손해금을 가산하도록 되어 있고, 그 다음 조항은 원고들이 위 돈을 모두 지급받으면 부동산의 가압류를 해제한다고 되어 있었다. 문제는 금전지급이 가압류해제와 동시이행이 아니라 선이행(先履行)으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