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자가 돈을 빌리면서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한 경우라면 빚을 먼저 갚고 다음에 담보의 말소를 구해야 하는 것이지 담보의 말소와 동시이행으로 돈을 변제하겠다고 하는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건과 같은 조정에 있어서는 가압류를 푸는 것과 동시에 공사대금을 지급하라고 명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
게다가 법정에서 원고들이 부가가치세를 부담한다는 약속을 했는데도 조정조항에는 아무 언급이 없다. 이것이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민사조정법 제30조)이었으면 이의라도 신청할 터인데 조정조서라고 되어 있어 어쩔 수 없이 「재판상의 화해와 동일한 효력」으로 묶이고 만 것이다.
나는 담당변호사에게 무슨 이런 조정을 하도록 보고 있었느냐고 나무랐다. 피고회사의 사장은 나의 고향 친구로서 칠십 평생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해본 일이 없는 어진 성품의 신사다. 소송물가액은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피고가 패소할 가능성은 매우 적은 사건인데 깨끗이 풀어주지 못한데다가 조정의 과정도 이상하게 되어 면목이 없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상해있는 나에게 그는 모두가 자기 탓이라고 하면서 담당변호사에게 점심이라도 사야겠다고 위로했다.
그러나 저러나 변제기(辨濟期)가 다가오니 지연손해금도 부담이 되고 해서 원고들과 참가인들의 주소에 가압류해제를 위한 인감증명을 소지하고 변호사 사무실에 와서 돈을 수령하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대부분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었고, 그래서 피고회사에 공사현장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간신히 원고 한 사람이 연락되고, 그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접촉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변제기 직전 조정조서와는 달리 가압류해제 서류를 받은 후 그 자리에서 돈을 지급하여 사건을 마무리 지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난 후 피고회사는 법원으로부터 한 통의 이행권고결정(履行勸告決定)이란 문서를 받았다. 다섯 사람의 원고가 또 공사대금 3백여 만 원씩을 달라는 소송이었는데, 법원은 소액사건심판법 제5조의3 제1항에 따라 피고에게 이행을 권고한 것이다. 청구원인사실을 보면 지난번 조정기일을 몰라서 법정에 못나갔기 때문에 피고로부터 돈을 받지 못했다는 취지였다. 이 사람들은 법정에만 나가면 판사가 호명하여 돈을 받게 해주는 것으로 들은 것 같다. 피고는 다시 한 번 엉뚱한 사람들과 공사대금의 유무를 가지고 싸워야 하게 된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 법원의 입장에서는 사건 하나가 조정성립으로 완결된 것으로 처리되었겠지만 그러한 조정은 그 성립의 과정과 내용에서 결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앞에서 말한 심포지엄에서 장용국(張容國) 부장판사는 조정에 있어서는 당사자의 자유의사가 존중되어야 하므로 「강요적인 조정은 삼가야 하는 것」이며, 「호양(互讓)이라는 측면이 조정절차에서 지나치게 강조되는 나머지 법규의 형식적 적용에 의한 정의(법적 안정성)를 무시한 채 오로지 구체적 타당성에 입각한 해결만을 고집하게 되면 오히려 조정제도의 이용을 국민이 꺼리게 되는 경향을 유발할 수 있음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작년이던가 어느 날 어떤 노인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와 시골 어느 법원의 조정에 갈음하는 조서 하나를 보여주면서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의견을 구하던 일이 생각난다. 부동산이전등기청구사건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피고는 원고의 청구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고 변론기익에 출석도 하지 아니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피고는 원고의 청구를 거부할 아무 이유가 없고 자기는 법원에 나가지 않을 것이니 뜻대로 처리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제자백(擬制自白)의 판결이 송달되기를 기다리는데 이게 날아 왔으니 이런 수도 있느냐는 것이었다.
조정조항은 원고의 청구취지를 그대로 수용하고 소송비용만 원고 피고 각자의 부담으로 한다는 결정이었다. 변론기일에 판사가 아무 말도 없었던가 물었더니 조정으로 처리하겠으니 가서 기다리라고 해서 돌아왔는데 그때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고 했다. 쓴웃음이 나왔다. 할 말이 없었지만 판사가 원고의 청구를 모두 받아들인 것은 틀림없으니 굳이 이의를 해서 법원에 나갈 것 있겠느냐고 말해 주었던 것 같다.
2002. 7. 1.부터 시행된 개정 민사소송법은 결정에 의한 화해권고제도(제225조, 제231조)를 도입했다. 법원은 소송에 계속 중인 사건에 관하여 직권으로 당사자의 이익, 그 밖의 모든 사정을 참작하여 청구의 취지에 어긋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사건의 공평한 해결을 위한 화해권고결정(和解勸告決定)을 할 수 있고, 그 결정서의 정본을 송달받은 날부터 2주 이내에 이의를 신청하지 아니한 때에는 재판상 화해와 같은 효력을 가지게 되는 제도이다.
어떤 변호사는 사건에 대한 판결선고기일이 지정되어 선고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하루 전에 느닷없이 화해권고결정이 송달되어 당사자에게 이를 설명하느라고 곤혹을 치렀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런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건에 대하여 심리를 끝내고 판결선고기일을 잡았으면 약속대로 판결로서 마무리를 지어야지 판결 이외의 해결방책을 제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재판은 결과가 물론 중요하지만 못지않게 그 과정도 정의로워야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