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사건을 파기 환송하면서 좀 더 심리해 보고 판단하나는 취지의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건을 환송받은 법원은 일찌감치 결론을 내 놓고 대충 심리한 다음 원래의 주문(主文)을 바꾸어 버립니다. 이것 또한 상급심의 재판을 지나치게 의식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두 번씩 파기되는 예도 봅니다. 당사자의 그로 인한 정신적 타격과 경제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지만, 판사의 얄팍한 처세술 같은 것이 눈에 아른거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당해사건(當該事件)이면 하급심은 당연히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에 기속(羈束)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부당하다고 판단되는 선례에 대해서도 부딪쳐 보는 용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명재판(名裁判)을 대 보라고 하면 무엇을 꼽을 것입니까. 기원전 천 년 전에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이 한 영아재판일 것입니다. 그는 그 시대 국왕으로서 만능의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지혜로운 판단력까지 지니고 있었습니다. 구약열왕기 상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두 여인이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중 한 계집은 “내가 저 여인과 한 집에 사는데 내가 해산한지 3일 만에 저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는데 밤중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저가 밤중에 일어나 잠자는 나도 모르게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 품에 누이고 죽은 자기 아들을 내 곁에 뉘었나이다. 새벽에 깨어본즉 죽었기로 자세히 보니 내 낳은 자식이 아니더이다”하매. 다른 계집은 이르되 “산 것은 내 아들이고 죽은 것은 네 아들이다”하며 서로 다투거늘 왕이 칼을 내게 가져오라 하여 칼을 가져오니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로 나누어 반씩 저들에게 주라”하니 산 아들의 어미는 그 아들이 불붙는 것 같아 왕에게 청컨대 “산 아들은 저 게집에게 주고 아무쪼록 죽이질랑 마옵소서”하고, 한 계집은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하니, 왕이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그가 정녕 어머니니라‘하매 온 백성이 왕의 심리 판결함을 보고 왕을 두려워하였다. 이렇게 기술되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그 이전에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 당시의 친자여부 판정은 오늘날처럼 피검사니 모발검사니 하는 과학적 방법을 동원할 수 없었고, 며칠 안 된 아기의 닮은 모습도 판별하기 어려웠습니다. 절대전능의 솔로몬 왕이 어머니들 앞에서 아기를 두 동강내어 반쪽씩 갈라가라고 명하였을 때 당장 아기를 살리겠다는 불같은 모성(母性)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줄은 왕은 진작 예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두 여인이 다 같이 애원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서에는 창녀계집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제 아이를 깔아뭉갠 계집이 남의 자식을 살리겠다고 울부짖지는 아니했을지 모릅니다.
앞으로 여러분에게 솔로몬 왕의 지혜로서 훌륭한 판정을 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앞에서 판사들에게 너무 판례에 집착한 재판의 자세를 비판했지만 그것은 판례의 매력과 위력을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실제 판례의 행방은 대법원에서 더 열심히 추적한다. 판례의 존재를 간과하였다가는 정말 낭패를 보게 되니 말이다. 법원조직법 제7조 제1항 제3호는 ⌜종전에 대법원에서 판시한 헌법․법률․명령 또는 규칙의 해석․적용에 관한 의견을 변경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는 경우⌟를 대법관 전원합의체의 심판 사항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소액사건심판법 제3조 제2호의 ⌜대법원의 판례에 상반되는 판단을 한 때⌟, 상고심절차에관한특례법 제4조 제3호의 ⌜대법원판례와 상반되게 해석한 때⌟, 제4호의 ⌜대법원판례가 없거나 대법원판례를 변경하는 필요가 있는 때⌟, 이렇게 명문으로 판례의 위상을 강조하고 있을 정도니 무섭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경험으로도 그랬다. 상고심에서 내려 온 기록표지에 ⌜파기환송(破棄還送)⌟이란 붉은 도장이 찍히고 그것이 나의 주심사건으로서 판결을 썼던 것이면 그 충격은 상당했다. 오판의 낙인이 찍힌 셈이니 자존심도 상했고 적어도 한 두 끼 밥맛이 없었다. 배석(陪席)판사 시절에는 재판장에게 미안했고, 중견(中堅)판사 시절에는 창피하고 좌절감 같은 것도 느꼈다. 특히 엄연히 판례가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그와 반대되는 판결을 했다가 뒤집힌 것이라면 말이 아닌 꼴이 된다. 그러나 끝까지 아래만 보고 기어간다는 것은 법관으로서의 자세일 수 없다. 비굴한 모습처럼 보기 흉한 것이 없다. 대법원도 애당초부터 마땅치 않거나 현실과 괴리된 것이라고 생각되는 판례에 대하여 반발해 보는 법관의 소신과 용기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판례변경(判例變更)의 전원합의체 판결을 보면 상고기각의 주문이 많다. 그것은 판례변경을 목적으로 한 항소심의 과감한 도전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주기동(朱基東) 부장판사의 ⌜형법 제62조 제1항에 위헌요소는 없는가⌟(법률신문 2002. 4. 22.)라는 글을 보면, 그는 서울지방법원 항소심 재판장으로서 감히 대법원판례에 도전했다가 4개월 만에 파기환송된 실패담을 “판사는 판결로 말할 뿐이다”라는 금언을 어긴 점에 대하여 법조인의 이해를 구한다면서 이야기했다. 대법원 2002. 2. 22. 선고 2001도6209 판결은 ⌜형법 제62조 제1항 단서에서 규정한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를 받아 집행을 종료한 후 또는 집행이 면제된 후로부터 5년이 경과하지 아니한 자’라는 의미는 실형의 선고를 받고 집행종료나 집행이 면제된 후부터 5년을 경과하지 아니한 경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그 유예기간이 경과하지 아니한 경우도 포함⌟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확립된 견해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심이 종전에 선고받은 징역형의 집행유예기간이 경과하지 아니한 피고인에게 다시 집행유예를 선고하였음은 형법 제62조 제1항 단서의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고 하였는데, 바로 그 원심판결의 주인공이다. 그는 예비판사에게 입법례도 조사시켰고, 국내학설이 대부분 종전의 판례를 비판하고 있는데 힘입어 그와 같은 판결을 하게 된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판례를 거역한 경위를 술회했다.
나도 지방법원 항소심 재판장으로 있을 때 그런 시도를 경험한 일이 있다. 대법원은 제권판결(帝權判決)이 있기 전에 수표를 정당하게 취득한 자가 지금은행에 지급제시를 하였거나 수표금 지급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여도 공시최고법원에 대한 권리신고나 청구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제권판결의 소극적효력으로서 그 수표의 소지인은 수표상의 권리를 행사하여 수표금 청구를 할 수 없다는 취지의 일관된 판례를 내고 있었다. 나는 평소 선의취득자를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 점에 관한 논문도 쓴 일이 있어 마침 소송물 가액도 얼마 안 되는 적당한 사례가 생겨 종래의 판례에 반대하는 장문의 판결이유를 만들어 대법원에 올렸다. 전원합의체에서 한번 논의라도 해주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기대는 4개월은커녕 올라가자마자 담박 깨어져 물거품이 되고 오판의 기록만 하나 더한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