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우리 법무법인에 조정위원의 추천을 의뢰하여 왔는데, 파트너 변호사들은 시간을 내기가 힘들고 그렇다고 초임 변호사를 내보내는 것도 적절하지 아니하여 생각 끝에 조정전담부의 조관행(趙寬行) 부장판사에게 대표변호사 본인이 희망하면 받아 주시겠는가 하고 의향을 떠보았다. 그랬더니 대법관출신의 조정위원은 처음인지라 고현철(高鉉哲) 원장과 상의해 보겠노라는 답이 오고, 이어 오케이 신호가 와서 나는 조정위원이 되었고, 나아가서 조정위원협의회의 고문으로 예우를 받는 몸이 되었다.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를 하면서 잠시 가사조정장의 경험을 한 바는 있지만, 법관으로, 변호사로 온갖 분쟁 더미의 냄새를 맡으며 살아오는 직업 때문에 사건의 조정과 화해 같은 일은 낯선 것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조정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조정제도가 정착화 되면서 서울지방법원의 경우 조정위원의 수는 4백 명이 넘는다. 각 직업을 참작하여 모두 12개 조로 나뉘어 있는데, 조별로 소속재판부와 조정위원들 사이의 간담회도 열고, 2년에 한 번 정도 조정위원 워크숍이나 세미나도 연다.
조정위원 초년병으로 약 1년 조정절차에 참석하여 보고 우선 놀란 일은 조정사건에 관하여 조정 당사자들과 조정위원들이 보여주는 참여의 열의와 성실한 자세였다. 담당법관이 사건을 잘 선정하여 조정에 회부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조정사건의 당사자 본인들은 조정기일에 시간을 맞추어 거의 빠짐없이 출석하여 질문에 답하고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진지한 모습들을 보여 주었다. 조정의 성부(成否)에 불구하고 조정위원회에 대한 당사자의 신뢰성을 확인해 주는 느낌이었다.
더욱 흐뭇하게 한 것은 조정위원들의 직무수행에 대한 성실성이었다. 법원이 조정위원을 위촉할 때 그 자질에 관하여 여러모로 검증을 한 탓도 있겠지만 한마디로 그 열정의 정도가 놀라웠다. 조정위원들은 대부분 일정 직장에 나가는 분들인데도 기일에 지각한다든지 결석하여 법원이나 관계인을 당혹하게 하는 일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더욱이 미리 사건에 관한 자료를 꼼꼼히 검토하고 그 내용을 잘 파악하여 조정에 들어가는 모습들을 보면, 30여 년 전 가정법원에서 조정을 할 때와 비교해서일까 한마디로 감동적이었다.
기일마다 조정수당이 지급되지만 왕복택시 요금이나 될까, 조정실에서만 보통 4시간 내외로 시달리는 것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봉사정신이 아니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법원은 법원대로 너무 빈약한 수당 때문에 미안해하고 있고, 점잖은 조정위원들은 그것이 국가예산상의 문제임을 아는지라 표면상으로 불평도 못한다.
법원행정처에서 발간한 ‘조정위원 직무편람’을 보면, 조정에 관한 모든 것을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충실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조정위원의 당사자에 대한 설득방법에 관하여 자세한 설명이 있는데 마치 명심보감을 대하는 느낌을 준다. 조정위원은 조정을 할 때 당사자에 대하여 여유 있는 태도로 대할 것이며, 감정적인 반발감을 표시해서는 안 된다. 당사자의 성격을 잘 파악한 다음 그에 맞는 설득을 하되, 논쟁을 하지 말 것이다. 당사자의 감정표출을 처음부터 제한하지 말고 체면을 지켜주도록 할 것이다. 당사자의 자주적 분쟁해결의욕을 이끌어 낼 것이며, 불성실하게 임기응변적 흥정을 하지 말 것이다. 분쟁해결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어야 한다는 등이 그 줄거리다.
최근에는 격년으로 만드는 ‘조정마당 열린 대화’라는 책자가 보내져 왔는데, 거기에는 세미나의 발표문을 비롯하여 판사들과 조정위원들의 유익하고 재미있는 글이 실려 있다. 황덕남(黃德南) 변호사는 사건의 성격과 당사자에 따라 다양한 조정방식을 적절하게 선택하거나 조합하여 의외로 수월하게 분쟁을 종료시킨 것과 거꾸로 잘못된 조정방식으로 당사자의 감정을 악화시켜 합의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든 사례를 이야기했는데, 전자의 경우를 여기 소개해 본다.
「당사자 쌍방이 극도의 감정적 대립상태에 있어 소가가 그리 크지도 않은데 도저히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그렇다고 정확하게 계산을 하여 결론을 도출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양 당사자들의 흥분이 고조되어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고, 쌍방을 분리하여 대화를 시도하여도 마치 고장 난 축음기마냥 동일한 이야기만 반복됐다. 이들을 설득하던 조정위원들도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하였고, 가장 다혈질인 한 조정위원에게서 호령형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여태 다투고도 또 더 다투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거시냐며 당사자에게 고성을 질러대기 시작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흥분상태인 당사자 중 일방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땀을 흘리더니 말을 더듬기 시작하였고 참석자들은 깜짝 놀라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말없이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다른 조정위원이 얼른 일어나 냉수 한 컵과 화장지를 들고 다가가 물을 권하고 얼굴에서 땀을 닦아주면서 진정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그 당사자와 비슷한 나이라고 하고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상하였느냐고 하면서 공감을 표시하여 주었다.
아주 잠깐 사이인데 당사자는 평정을 되찾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더니 한바탕 하소연을 하기 시작하였다. 상대방이나 조정위원들은 그 하소연을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러자 하소연을 끝낸 당사자는 조정위원들의 권유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그동안 재판을 진행하면서 한 번도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조정위원이 이렇게 손수 물도 따라주는 것을 보고 양보할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어차피 금액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하면서 상대방 역시 못이기는 척하고 조정안에 동의하여 분쟁은 종결되었고, 두 사람은 악수를 하면서 헤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