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는 「각」과 다르다. 후자는 중첩관계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독립적 관계를 표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각자」는 「연대하여」,「합동하여」(어음법 제47조, 수표법 제43조)의 표현처럼 각 피고에 대하여 채권 전액을 집행할 수 있고, 그 중 한 사람의 피고로부터 만족을 얻으면 그 한도 내에서 다른 피고들에 대한 관계에서도 채권이 소멸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일반사람으로서 그 누가 이해하겠는가. 판결의 이유도 아닌 주문에서 그 내용 또는 해석이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되도록 이해하기 쉬운 말로 고쳐야 한다.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 「각자」란 용어 대신 다른 적당한 말이 없을까 생각해 보아도 금방 뾰족한 용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각자」란 말을 생략할 수도 없다. 아무런 다른 말이 없이 피고들은 원고 갑1에게 580,840원을 지급하라고 한다면 그때는 분할채무(민법 제408조)의 원칙 때문에 피고별로 균분액(193,613원)의 지급을 명하는 표현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문을 잘못 표기하여 파기된 예 하나를 소개하기로 한다. 「원심판결은 그 이유에서 이 사건 자동차사고로 인하여 피고들이 원고에게 배상할 총액은 금 8,714,898원이라고 확정한 다음 위 금원에 대하여 버스운전사인 피고 을1은 금 8,714,898원을, 위 버스소유자인 피고 을2는 상계항변이 인정된 금 3,540,000원을 공제한 금 5,174,898원을 각자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하고서, 그 주문에서는 피고 을2는 금 5,174,898원을, 피고 을1은 금 8,714,898원을 각 지급하라고 명하고 있는 바, 그렇다면 원심판결은 그 이유에서는 피고들이 원고에게 지급할 총액을 금 8,714,898원으로 확정하고서 주문에서는 피고 을2에게 금 5,174,898원을, 피고 을1에게 금 8,714,898원의 각 지급을 명함으로써 결국 합계 금 13,889,796원의 지급을 명한 결과가 되어 그 이유와 주문에 모순이 있다 할 것이고 이는 원심판결의 파기사유에 해당한다」(대법원 1984. 6. 26. 선고 84다카88, 89 판결). 판사도 이렇게 실수를 하는데 일반사람이 어찌 「각자」와 「각」을 구별하겠는가.
다른 사건 하나
조정기일에 지배인이 출석한 원고는 유명 의류제조품을 생산‧판매하는 회사이고, 피고는 원고와 판매점계약을 체결하고 거래관계를 이어오다가 점포를 닫은 사람으로서 멀리 온양에서 상경했다. 원고는 물품대금 미수액이 2,688,818원이라고 주장하는데, 피고는 이를 부인하고 반소(反訴)로서 오히려 14,180,526원을 청구했다. 원고의 주장과는 달리 공급물품의 부족, 반품 등에 대한 정산을 하여주지 않았다는 취지이다.
이 소액사건은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에서 2001. 8. 8. 「원고(반소피고)는 피고(반소원고)에게 2,744,818원 및 2000. 11. 3.부터 갚는 날까지 연 25%의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원고(반소피고)의 본소청구 및 피고(반소원고)의 나머지 반소청구를 각 기각한다」라는 판결이 선고되었고, 원고가 항소했다.
1차 조정기일에 쌍방이 출석했는데, 항소인인 원고 측에서 피고가 반소를 포기하면 원고도 소를 취하(取下)할 용의가 있다고 나왔다. 나는 조정의 성공 가능성을 예견했다. 이 사건은 피항소인을 위하여서라도 쌍방 없던 일로 돌리는 것이 좋겠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을 검토해보니 피고의 손을 들어준 제1심판결은 한마디로 잘못된 것이었다. 피고본인의 주장 자체부터 요령부득인데다가 원고에 대한 반대채권을 인정할 만한 증거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반대로 원고 측에서 제출한 상업장부 같은 것은 배척하기 어려운 문서라고 할 수 있었다. 판결로서 결말을 보게 되면 제1심판결의 피고승소부분은 취소될 공산이 컸다. 조정장인법관도 기록을 다 검토하고 조정위원에게 원고의 태도에 따라 피고의 청구를 포기시키도록 설득해보라고 지시했던 터였다.
그런데 피고의 태도는 완강했다. 성깔이 있는 피고는 옆에 앉은 원고지배인을 노려보면서 준비서면에 쓴 내용을 가지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대법원까지 가겠다. 판결을 해 달라고 버티는 것이었다. 그런 정도로 자신이 있다면 판결로 해결하는 것 하나도 어려운 것 없지만 성질 부려서 손해 볼 것 없지 않는가. 오늘 집에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시고 다음 기일에 만나자고 하여 헤어졌다.
다음 조정기일에서는 피고의 태도가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지만 약간 희망이 보였다. 어느 순간에 가서는 위원님들 방침에 따르는 것이 현명한 것인 줄은 안다고 말하기도 했다. 변호사도 없이 대기업을 상대로 거꾸로 이겼으니 간단히 포기할 생각이 나겠는가. 피고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원고 지배인에게 슬쩍 떠보았다. 제1심판결도 있고 하니 피고에게 얼마 정도 위자료 주는 셈치고 양보할 수 없느냐고 했더니 자기에게 그럴 권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응할 가능성이 적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피고 스스로도 항소심에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앞으로 재판 때문에 멀리서 몇 번이나 내왕해야 하고 제출한 증거서류도 보완해야 하며 준비서면도 판사가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써내야 하는데 혼자서 해내겠느냐 조정위원들은 반 설득 반 위협으로 피고를 몰아세웠다. 끝내 피고는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만 했다.
나는 조정이 성립되지 아니하는 것으로 단정하고 제법 화난 표정으로 “아까운 시간만 버렸다”고 피고를 원망했다. 그리고 또 한마디 보태어 겁을 주었다. “이제 재판에 가니까 하는 말인데 피고는 변호사를 대든지 법률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좀 위험할 것 같아요. 잘 해보세요.” 우리 조정위원들은 모두 헛수고했다면서 아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피고가 다급하게 소리치면서 다가왔다. “위원님 조정 그대로 하겠어요, 조정해 주세요.” 나는 순간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피고를 쳐다보다가 마침 원고지배인이 곁에서 실실 웃고 있길래 그럼 모두 들어갑시다, 못이긴 듯이 조정실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군말 없이 조정조항에 서명했다. 조정위원 한 분이 피고에게 이제 지난 일 다 잊고 새로운 기분으로 하는 사업에 열중하시기 바란다고 말하고 상대방에게 악수나 하고 헤어지라고 했더니, 어림도 없다는 투로 다시 보기도 싫다던가 혼잣말로 내뱉으면서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그 날 이 사건에만 두 시간이 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