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소송법 교과서를 보면 민사소송의 이상(理想)으로서 적정(適正), 공평(公平), 신속(迅速), 경제(經濟) 이 넷을 들고 있다.
적정이란 올바르고 잘못이 없는 재판을 말하며, 소송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요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사소송의 심리에 있어서는 처분권주의(민사소송법 제203조)와 변론주의의 원칙에 따라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한 정의의 구현을 바랄 수는 없고, 소송당사자 사이에만 타당한 상대적 해결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공평이란 당사자의 한쪽에 치우치는 재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속이란 소송의 지연을 막는 것이고, 경제란 소송에 드는 비용과 노력을 최소한으로 그치게 한다는 요청이다.
민사소송에 있어서의 적정이나 공평 그리고 경제의 이상은 3심제도 등의 불복신청, 심리의 공개나 법관의 기피제도 등을 두고 있는데다가, 구술신청, 변호사보수의 소송비용산입 등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물론 신속에 관해서도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독촉절차, 소액사건심판절차, 변론준비절차 등 여러 가지 제도적 보장을 하고 있다.
국민이 이용하기 쉬운 소송제도의 실현은 민사소송제도를 공적(公的)서비스의 일종으로 파악할 때 가능하다. 서비스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하기 위해서는 서비스 내용의 달성 그 자체에다가 서비스의 질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아무리 맛있는 요리라도 그 음식이 나오기까지 세 시간이 걸린다던가, 몇 백만 원의 값을 치러야 한다든가 해서는 좋은 서비스라고 하기 어렵다. 서비스의 질로서 신속성과 염가성은 불가결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민사소송제도의 개혁이 논의될 때마다 소송의 신속화(迅速化), 비용적정화(費用適正化)는 중요한 검토과제로 되고 있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여러 가지 방안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속은 다른 이상과 달리 어디까지나 법관의 재량이 크게 작용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그 실현에 관하여 항상 말썽이 따른다. 여기서는 소송의 신속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재판의 신속에 관해서는 헌법 제27조 제3항 전문에서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하여 국민의 기본권의 하나로 보장하고 있다. 그렇다. 재판을 지연시키는 것은 권리보호를 거절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송의 지연은 민주사법의 신뢰를 해치는 것이고, 소송의 촉진은 사법(司法)의 사활문제에 다름없는 것이다.
재판의 지연을 막기 위하여 민사소송법 제199조는 「판결은 소가 제기된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 다만, 항소심 및 상고심에서는 기록을 받은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고 하고, 제207조 제1항은 「판결은 변론이 종결된 날부터 2주 이내에 선고하여야 하며, 복잡한 사건이나 그 밖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때에도 변론이 종결된 날부터 4주를 넘겨서는 아니 된다」고 하여 판결의 선고기간을 법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훈시규정(訓示規定)에 그친다. 법관은 판결선고기간에 대한 위와 같은 규정을 염두에 둘 만치 한가하지 않다. 철저히 사문화(死文化)된 조항이다. 상고사건에 관하여서는 상고심절차에관한특례법 제4조에 의하여 4월 이내에 심리의 불속행(不續行)으로 선고 없이 상고기각의 판결을 할 수 있도록 했으나 이는 대법관의 재량에 달려 있을 뿐이다.
민사사건의 의뢰인(依賴人)이 하는 첫마디는 대개가 판결까지 시일이 얼마나 걸리겠느냐 하는 것부터 묻는다. 건물명도소송과 같이 내용이 뻔하고 시급한 사건의 원고는 당연히 그런 질문부터 한다. 변호사의 대답도 시원할 수가 없다. 변론기일이 언제 잡힐지도 재판부에 따라 다를 것이고 무엇보다도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소송의 진행속도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집중심리제도, 가집행의 선고에 의하여 제1심 재판에만 이겨도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데 크게 지장이 없다. 금전소송과 같은 것은 제1심에서 승소하는 날이면 고율의 지연손해금(소송측진등에관한특례법제3조제1항의법정이율에관한규정)이 붙기 때문에 승소한 원고가 오히려 느긋해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소송이란 것은 그 사건의 해결에 필요한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여야 하고 그와 더불어 법원의 기능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공해소송, 의료과오소송, 건축하자소송과 같이 심리의 진행에 어려움을 주는 유형의 복잡한 소송이 특히 그렇다. 그러나 그 기간이 합리적인 한도를 초과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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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볍관 시절인 1990년 서울 고등법원 재판사무감사 기념촬영 /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필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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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나는 대법관으로서 당시 부의 재판장, 주심관계에 있던 윤영철(尹永哲) 대법관과 함께 서울고등법원에 재판사무감사를 한 일이 있다. 그때 세칭 구로동 토지사건이라고 하는 20여 년 묵은 골치 아픈 사건을 처리한 직후인지라 재판부의 노고를 치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0년 전에는 17년의 세월이 소요된 중곡동 토지사건의 재판이 있었다. 그토록 오래 재판을 하지 못한 채 방치한 사연에 대하여 사법자료적인 관점에서 그 원인을 규명하고 전말을 조사해 놓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된다. 나는 대도시 법원의 사무감사를 할 때 으레 장기미제사건(長期未濟事件)을 챙겨보고 기록을 통하여 그 원인과 대책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는 스타일로 임했다.
당시 서울고등법원의 경우 김지하(金芝河) 시인에 대한 형사사건이 1990. 4. 30. 면소판결로 종결되었는데 그 사건의 번호는 77노305였으므로 항소된 지 13년 만에 판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기택(李基澤) 의원의 국회의원선거법 위반사건의 경우 제1심에서 징역 6월, 1년간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는데, 항소심(81노712)은 1981. 12. 18. 제1차 공판이 열리고, 1985. 2. 1. 기일이 추후로 지정된 후 1990. 7. 18. 제21차 공판이 열렸고, 다시 1990. 9. 14. 기일이 추후지정으로 되어 그 진행이 멈추어져 있었다. 법관의 직무유기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