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사건에 관하여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내가 겪은 상고심사건을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이야기의 핵심은 늦은 재판 그것이다. 1995년 5월 나는 10인의 대학교수를 대리하여 학교법인을 상대로 한 재심(再審)의 소를 대법원에 제기했다. 원고들이 패소로 확정된 대법원 1995. 4. 7. 선고 94다4332 판결에 재심사유가 있으므로 그 판결을 취소하고 다시 상고심의 최종재판을 해 달라는 소송이었다. 그러나 2000. 5. 18. 대법원 전원합의체(全員合議體)에서 재심청구를 기각하는 판결(95제다199)이 선고되어 끝났다. 5년이 걸린 판결이었다.
대법원은 상고이유서나 재항고이유서 또는 재심소장이나 답변서를 검토하고 판결을 선고하는 서면심리의 심급이다. 변론(辯論)이란 게 없으므로 법정에서의 소송자료의 제출이나 증거제출의 공방이 없다. 그래서 그냥 당사자가 제출한 문서를 읽고 원심판결 또는 재심대상판결의 당부를 검토하는 것이다. 합의가 이루어지고 결론이 도출되면 선고기일을 지정하여 판결의 주문을 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당사자나 대리인은 그 선고기일소환장이 송달되기까지 사건에 대하여 언제 어떻게 심리하고 합의를 했는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다. 당사자 본인이야 오직 애가 타고 초조하겠는가, “변호사님 저의 사건은 언제쯤 판결이 됩니까, 좀 알아봐 주실 수 없습니까”, “글쎄요, 선고 기일을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대리인으로부터 시원한 답을 얻을 수 없는 소송당사자는 대법원에 몇 차례나 탄원서 같은 것을 제출해 보기도 했다. 허공에 대고 소리질러보는 것처럼 소용없는 짓임을 알면서 그 밖에 꿈틀거리고 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그러면서 5년이 걸린 것이다. 도대체 무슨 사건이기에 상고심에서 그렇게 긴 세월을 필요로 했는가. 대법원은 대법원대로 재판을 신속히 하지 못한 이유를 내세울 수가 있을 것이다. 보다시피 부(部)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전원합의체에 회부된 복잡한 사건이 아닌가. 그렇다. 전원합의체에서조차 의견이 갈릴 정도로 법률상의 쟁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판례저촉(判例抵觸)의 재심사유가 존재하는가의 여부, 면직무효확인의 이익이 있는가의 여부에 관하여 대법관 4인의 소수의견이 있는 정도의 논란이 담겨있는 판결이다. 그래놓고 한번 평가해 보자. 그래서 5년이나 묵혀둘 사건인가를.
원고들은 모두 피고인 학교법인의 대학에서 10년 내지 20년간 근무해 온 교수들인데, 직무수행능력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1989. 1. 4. 직위 해제되고 대기를 명 받았다가 같은 해 4. 29. 면직처분을 받았다. 원고들은 직위해제 및 면직처분의 무효확인을 구하는 소를 제기하여 제1심 및 제2심에서 승소했으나 재심대상의 대법원판결은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제1심판결을 취소하면서 소를 각하(却下)하는 자판(自判)을 했다.
그 이유는 사립학교법의 규정에 의하여 계약기간을 정하여 임용된 교원은 학교법인의 정관이나 대학교원의 인사규정상 임용기간이 만료되는 교원에 대한 재임용의무를 부여하는 근거규정이 없으므로 원고들은 임용기간의 만료로 당연히 교수의 신분을 상실했고, 따라서 직위해제 및 면직처분이 무효라고 하더라도 교수의 신분을 회복할 수 없으므로 그 무효확인을 구하는 청구는 과거의 법률관계의 확인청구에 지나지 아니한다는 것이고, 나아가서 직위해제 또는 면직된 경우 징계에 의하여 파면 또는 해임된 경우와는 달리 공직이나 교원으로 임용되는데 있어서 법령상의 아무런 제약이 없을 뿐 아니라 위와 같은 전력이 있으면 공직 또는 교원으로 임용되는 데에 있어서 그러한 전력이 없는 사람보다 불이익한 장애사유로 작용한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법률상의 이익이 침해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위의 판결은 종전의 대법원판례(1991. 7. 23. 선고 91다12820 판결, 1993. 9. 10. 선고 93다10743 판결)에 저촉되어 대법관 전원의 3분의 2 이상의 합의체에서 심판하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법관 4인으로 구성된 부의 합의체에서 재판했으므로, 민사소송법 제42조 제1항 제1호 소정의 재심사유에 해당한다는 것이 재심의 이유이고, 그 원심인 고등법원판결이 정당하기 때문에 재심대상의 대법원판결을 취소하고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는 판결을 해 주십사라는 것이 본안(本案)에 관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번 전원합의체판결은 대법관13인 중 9대4로 재심원고들의 청구를 배척하였는데, 그 이유는 재심사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저촉되는 판례로 지적된 대법원의 종전견해를 폐기한 때문이었다.
다수의견(多數意見)은 재심대상의 대법원판결과 똑같은 이유로 원고들의 법률상 이익이 침해되었다고 볼 수 없으니 그 무효확인을 구할 이익이 없다는 것이었고, 「이 사건에서와 같이 이미 임기가 만료되어 소송결과에 의해 법률상 그 직위가 회복되지 않는 이상 직위해제 및 면직무효의 확인은 그것만으로는 당해 소송에서 추구하는 권리구제의 기능이 있다고 할 수 없고, 침해된 급료지급청구권이나 사실상의 명예를 회복하는 수단은 바로 급료의 지급을 구하거나 명예훼손을 전제로 한 손해배상을 구하는 등의 이행청구소송으로 직접적인 권리구제 방법이 있는 이상 무효확인 소송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사자의 권리구제를 봉쇄하는 것도 아닌 것이며, 명예의 중요성은 교원뿐만 아니라 회사임원, 근로자 등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것일 진데 그들과의 관계에서는 확인의 이익이 없다고 하면서도 유독 교원만을 달리하여 취급할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이 사건은 제1심 지방법원이 1992. 4. 25.에 판결(89가합6633)했고, 고등법원이 1993. 12. 8.에 판결(92나3631)했으며, 대법원이 1995. 4. 7.에 선고(94다4332)했으므로, 그 기간이 약 6년 걸린 데다가 이번 대법원의 재심판결이 있기까지의 5년을 합하면 재심원고들은 11년 넘게 법쟁투쟁을 해 온 셈이 된다. 그나마 승소하여 명예라도 회복되었으면 위안이라도 받겠는데 그러지도 못했으니 당사자의 심정은 얼마나 아플 것인가. 최종심의 사건을 맡아 오래오래 애만 타게 했으니 장기화된 재판을 방치한 변호사도 책임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재심사건의 소장(訴狀)을 제출한 소송대리인으로서 대법원판결의 당부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치 아니한 감이 없지 아니하나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바가 있어 한번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이번 재심판결도 그렇고 재심대상판결도 마찬가지로 원고 대학교수들이 고등법원의 변론종결일 이전에 그 임용기간이 만료됨으로써 교수신분을 상실했으므로 직위해제 및 면직처분이 무효라고 하더라도 교수의 신분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니, 그 무효확인을 구하는 청구는 과거의 법률관계의 확인청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나아가서 직위해제 또는 면직된 경우 그러한 전력으로서도 공직 또는 교원으로 임용되는데 있어서 사실상 불이익한 장애사유로 작용한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법률상의 이익이 침해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의 판단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