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법원의 재판이 늦는 문제로 일반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은 선거범죄(選擧犯罪)의 형사재판과 선거소송이 아닌가 싶다. 동아일보는 2002. 5. 31. 「대법원 선거사범 늑장 재판 논란」이란 제목으로 선거사범에 대한 늑장재판이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대법원조차도 법에 정해진 재판기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현역 의원 4명에 대해 항소심판결이 난 지 6개월 가까이 되었는데도 판결기일을 잡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대법원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선거법에 정해진 대로 항소심판결 후 3개월 이내에 상고심판결을 내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선거사범 재판은 당사자들의 정치생명이 걸려 있어 치열하게 다투기 때문에 충분한 심리를 위하여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통합선거법) 제270조는 표제명을 이례적으로 「선거범의 재판기간에 관한 강행규정」이라고 하여 강행규정(强行規定)임을 못박고, 「선거범과 그 공범에 관한 재판은 다른 재판에 우선하여 신속히 하여야 하며, 그 판결의 선고는 제1심에서는 공소가 제기된 날부터 6월 이내에, 제2심 및 제3심에서는 전심의 판결의 선고가 있은 날부터 각각 3월 이내에 반드시 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선거범 재판을 빨리 처리하려는 의지를 반영한 규정인 것은 알겠는데 뭘 알고 만들었는지 한마디로 웃기는 조항이다.
제3심의 경우를 보자. 항소심재판이 있고부터 상고기간(형사소송법 제374조), 기록송부기간(제377조), 상고이유서와 답변서의 제출기간(제379조) 그리고 송달기간을 합하면 2개월이 넘는데, 나머지 한 달 안에 「반드시」 판결을 하여야 한다니 무리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도대체 지키지도 못할 법률을 만들어 놓고 강행규정이니 뭐니 하고 있는데 그러면 법정기간 내에 재판이 되지 못하고 기간을 넘겨 선고된 재판의 효력은 어찌된다는 말인가. 그런 대법원판결이 무효라고 하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2002. 3. 15. 한국법학원에서 개최한 심포지엄(저스티스 제66호)에서 중앙대의 권영설(權寧卨) 교수는 「현실적으로 당선인인 국회의원이 불체포특권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위의 조문의 실효성은 물론이거니와 당연히 예견되었어야 할 이 같은 경우들이 입법적으로 반영되지 않았음은 처음부터 입법의 미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하고, 위의 조항이 끝내 선언적 의미를 갖는 것에 그친다고 하더라도 처리시한을 어긴 사법부의 책임은 또 다른 차원에서 면제되거나 회피될 수는 없다고 본다고 했다.
동아대의 정만희(鄭萬喜) 교수도 통합선거법의 위의 규정은 「법정기간 위반에 대한 제재가 없으므로 여전히 훈시규정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선거범죄전담법관들은 재판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입법론적으로 공판준비절차의 도입, 심급을 2심제로 단축하자는 방안, 상고심에서 파기자판 하자는 방안, 관할을 집중하자는 방안, 집중심리제의 도입, 제한적 궐석재판제의 도입 등을 논의하고 있지만, 사법부 자체의 제도와 운영의 개선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당선자의 선거법위반죄에 대한 재판이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다시 말하자면 재판의 지연에 대한 원인은 누가 조성하고 있는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 대법원 2002. 6. 25. 선고 200도45 판결을 보자. 국회의원인 피고인은 당선무효가 되어 의원직을 박탈당하게 되는 확정판결을 회피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공판기일에 출석하지 않는 것인데, 의사일정이나 지역구 행사를 빌미로 기일의 연기나 변경을 신청하고 재판에 응하지 않는 것이다. 다음에는 변호인을 통하여 증거를 신청하고 증인이 불출석하면 재소환하도록 하는 등 법정에서의 투쟁으로 지연술을 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전도 상고심에서는 전혀 작동할 수 없다. 위의 대법원판결도 항소심재판이 있은 날로부터 6개월 만에 상고기각으로 종결된 것이다.
판결내용을 보면 원심에서 재판을 신속히 마무리하기 위해 「일정한 선고기일을 염두에 두고 공판기일을 정하여 진행」했던 모양인데, 이 점을 비난하는 상고이유에 대하여 「원심의 그러한 조치는 검사의 공소유지 및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에 실질적인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위 법규정을 최대한 준수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에 충분하므로 이를 자의적인 재판진행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고, 공판기일의 지정과 그 기일에서의 소송지휘에 대한 원심 재판장의 권한을 「구체적인 사건의 심리과정에 적합하게 합목적적으로 행사하였다」고 지지하고 있다. 또한 공판 도중 원심 재판장에 대하여 기피(忌避)신청을 하고, 그것이 소송지연을 목적으로 한 것이 명백하다고 하여 기각되자 즉시항고를 하는 등 재판진행을 막기 위하여 극단적인 처방까지 쓴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선거사범에 대한 재판이 왜 그렇게 늦어지는지를 알만하다고 하겠다.
재판의 지연에 대한 불만은 시간을 다투는 각종 재판에서 수시로 터진다. 최근에는 사법시험, 세무사시험, 공인중개사시험 등 각종 시험에 관련된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에 대하여서도 수험생들로부터 거기에 소요되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어 피해구제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수험생들을 지치게 만들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시험문제에 대한 시비는 많은 경우 감정(鑑定)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법원으로서도 신속히 처리하지 못하는 고충도 있지만 승패보다 시간이 더 급한 수험생의 입장도 딱한 것은 사실이다.
이번에는 형사사건에 대한 재판지연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앞에서 하급심의 특정 장기미제(長期未濟)사건에 대하여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그 큰 원인은 재판부가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고 책임을 벗어나려는 안일한 자세를 갖는데서 비롯된 것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종류의 사건이라도 가령 무죄가 될지 모르는 사건을 몇 년이고 재판을 끈다고 생각할 때 죄책에 대하여 유무죄의 판정이 없이 피고인(被告人)이라는 불안한 지위에 놓여 있어야 할 고통, 거기에 수반되는 유형무형의 사회적 불이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장차 무죄판결의 선고가 있다 하더라도 그 고통과 불이익은 씻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피고인 또는 증인의 기억은 쇠퇴해지고, 증거는 흩어지든가 사라지게 마련이며, 피고인의 방어활동도 점점 장해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혀 죄 없는 사람을 벌하지 않고 죄지은 사람을 놓치지 아니함으로써 형벌법령을 적정‧신속하게 실현한다고 하는 형사사법의 이념을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장기간이 경과되어 형벌을 준다하더라도 사건의 예방(豫防)면에서나 범인의 갱생(更生)면에서도 그 효과는 별로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헌법 제27조 제3항은 형사피고인의 인권보장을 위하여 신속한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있은 사건 즉, 15년 넘게 재판을 중단하고 있던 사건에 대하여 상고심이 그 심리를 끝내고 면소(免訴) 판결을 한 사건의 예를 소개하기로 한다. 30여 명의 피고인들은 어떤 사람의 집에 침입하여 기물을 부수고 폭행을 했을 뿐만 아니라, 파출소에 돌과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지른 죄로 기소되었다. 제1심 지방법원에서의 공판심리는 1953. 6. 18. 열렸는데, 그 이듬해 3. 4.의 공판기일을 끝으로 심리가 중단되고, 그 후 1969. 9. 25. 심리가 재개되었다. 무려 15년 여 동안 전혀 심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지연된 것은 피고인들 중 일부가 다른 사건의 피고인으로 되어 있고, 변호인 측으로부터 다른 사건의 우선 심리를 요청한 것도 그 원인의 하나이긴 했으나, 그렇게 오랫동안 재판을 방치할 이유는 없었다.
제1심 지방법원은 헌법에 의하여 보장된 피고인들의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했다고 인정하고 공소시효가 완성된 경우에 준하여 피고인들을 면소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형사소송법에 재판의 지연으로부터 피고인들을 구제할 아무런 규정이 없고, 그것은 입법(立法)에 의하여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지 법의 해석으로 이를 구제할 여지는 없다고 하여 검사의 항소를 받아들여 원심판결을 파기했다.
최고재판소 대법정(大法廷)은 1972. 12. 20.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검사의 항소를 기각하여 제1심판결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 이유는 「심리가 현저히 지연됨으로써 신속한 재판의 보장조항으로 헌법이 지키고자 하는 피고인의 여러 이익이 현저하게 침해된다고 인정되는 이상한 사태가 생기게 된 경우, 다시 심리를 계속하더라도 진실을 발견하기는 매우 곤란할 뿐만 아니라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는 없고, 공연히 피고인들의 개인적‧사회적 불이익을 증대케 하는 결과가 될 뿐 더 이상 실체적 심리를 진행한다는 것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그 절차를 이 단계에서 끝내는 비상구제수단을 쓰는 것이 헌법상의 요청」이라고 풀이하고 면소를 선고한 제1심판결을 확정시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