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별의별 이상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가, 아무리 규명해도 끝내 진상을 찾지 못하고 수수께끼로 남는 사건이 더러 있다. 피해자가 생존해 있지 않고 혐의자가 범행을 부인하는 데다가 물증(物證)이건 인증(人證)이건 직접증거가 없는 사건은 결국 미국에 빠지기 쉽다. 과학적인 추적에 의하여 진실을 밝혀낼 듯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렇게 되면 혐의자를 기소한 검사와 변호인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게 되고 판사는 유무죄 어느 쪽을 판정해야 하는데 보는 관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기도 한다. 유죄라면 극형(極刑)을 면치 못하는 사건일 때 판관의 고민은 무겁다. 사형을 선고할 만한 중죄자를 방면하는 오류를 범해도 안 되고, 무고(無辜)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오판을 저질러서도 안 된다. 그런 사건이 법원에 계류되어 있었다. 이른바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이다.
피고인은 외과의사. 1995. 6. 12. 오전 피고인의 집에 불이 났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서와 경찰은 화장실에서 치과의사인 부인과 한 살배기 딸이 목 졸려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사를 벌인 경찰은 3개월 뒤 남편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살인 등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전 미식축구스타의 부인살해사건과 유사하다고 해서 한국판 O. J. 심슨 사건으로 불리며 세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은 피고인이 1995. 6. 11. 23:30 경부터 다음날 00:30 경 사이에 처와 딸을 목 졸라 살해한 후 사체를 욕조에 담그고, 안방 장롱에 있는 옷에 불을 붙여 방화를 했다는 범죄사실에 대하여 유죄로 인정하고 1996. 2. 23.(95고합228) 사형(死刑)을 선고했다.
공소사실(公訴事實)은 피고인 부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아니하여 서로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있어 그 잠재적 감정이 어떤 계기를 만나 폭발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전제한 후, 06:11. 위 사건 추정시간에 부인 몰래 거실 베란다의 커튼 줄을 끊어 살해도구를 준비한 다음, 무방비 상태에 있던 부인에게 다가가 등 쪽으로부터 목 앞부분에 위 줄을 걸고 뒤에서 묶어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겨 졸라서 부인을 살해하고, 상당시간 후 딸도 그 장래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할 때 차라리 살해하는 것이 낫다는 엄청난 상황 혼란에 따른 오판을 하고 위 줄보다 가는 어떤 줄로 목을 졸라서 딸을 살해하고, 그 후 피고인은 혐의 회피 방법 등을 고심하던 끝에 위 아파트에 서서히 타들어 가는 방법으로 불을 놓아 수사에 혼선을 주게 할 목적으로, 다음날 07:00경 출근할 무렵 밀폐된 아파트 안방에 있는 장롱을 거쳐 결국 아파트 안방 전체에 번지게 하여 피고인 및 피해자들이 주거로 사용하는 아파트 안방을 모두 태움으로써 건조물을 소훼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1996. 6. 26.(96노540) 피고인에 대하여 제1심판결을 뒤엎고 무죄를 선고했다.
그 판결이유에 의하면, 이 사건 범행이 피고인에 의한 것인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피해자 부인이 1995. 6. 11. 22:30 경 그 언니와 전화통화를 한 사실이 피고인이 아파트를 나간 시간이 다음날인 6. 12. 06:55 경에서 07:00 경 사이인 사실은 명백하므로, 과연 피해자들이 그 사이에 살해된 점에 대한 입증이 있는지 여부가 주된 쟁점이 된다고 전제한 다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의 시반(屍斑), 시강(屍剛) 및 위(胃) 내용물의 감정에 의한 사망 시간 추정 그리고 발화시간 실험결과는 피고인이 아파트를 나선 07:00 경 이후에 피해자들이 살해되었을 가능성과 아파트에 대한 발화 역시 그 이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화장실 벽의 물기 잔존에 관한 실험결과와 사건 발생 후 발견된 조기의 형태도, 사건 당일 아침 아파트 화장실에서 샤워를 했고 아침식사 시 조기 반 마리를 먹었다고 주장하면서 범행을 부인하는 피고인의 변소가 거짓이라고 단정할 자료가 되지 않으며, 이 사건 커튼 줄의 성상과 형태 등에 의하더라도 그것이 범행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피고인에 대한 거짓말탐지기 검사결과는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거나 신빙성이 없고, 또 피고인에게 공소사실과 같은 범행동기가 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으며, 이 사건 범행이 외부에서 침입한 제3자에 의하여 저질러졌을 가능성을 낮게 볼 수밖에 없는 여러 정황이 있기는 하나 제3자의 범행이 물리적‧객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 대한 검사의 입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외 피고인이 이 사건 발생 후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자신이 형사처벌가능성만을 염려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제3자의 진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점만으로는 피고인의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반면, 부인이 사망 당시 콘택트렌즈를 착용하고 있었던 점이나 아파트 다용도실 내 전자레인지에서 부인이 아침에 먹으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한약봉지가 발견된 점은 부인이 사건 당일 아침 피고인이 출근한 후에 살해되었다고도 볼 수 있게 하므로, 이 점에 관한 의문이 풀리기 전에는 피고인의 유죄가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이 증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은 1998. 11. 13(96도1783) 검사의 상고를 받아들여 항소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환송(還送)했다. 대법원도 피해자들이 사건 당일인 6. 12. 07:00 경 이전에 사망한 것이라면 범인이 피고인일 수밖에 없고, 그 이후에 사망한 것이라면 피고인이 범인일 수가 없을 것이므로 피해자들의 사망시간이 언제인가 하는 점이 쟁점이 되고, 한편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라면 그 범행은 피고인이 아파트를 나선 07:00 경에서부터 08:40 내지 50 무렵 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므로 그러한 범행이 과연 시간적‧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여부가 그 쟁점이 된다고 전제한 다음 항소심의 증거판단에 대한 잘못을 일일이 지적했다.
즉 시반, 시강 및 위 내용물에 의한 사망시간 추정에 대하여, 항소심이 「이 사건감정의 증명력을 개별적으로 배척하면서 든 위와 같은 사유들은 그 근거가 미흡하다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유만으로 피해자들의 사망시간이 피고인이 이 사건 아파트를 나서기 이전으로 추정됨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이 사건감정의 증명력을 모두 부정한 채 그 종합적인 증명력을 따져보지 아니한 것은 합리적인 증거판단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했고, 제3자의 범행가능성에 대하여서도, 「피고인의 아침식사 흔적을 모두 치운 후에 부인을 살해하고, 이어서 딸까지 살해하여 양인의 사체를 욕조에 물을 채운 후 그 속에 집어넣는 등의 증거인멸을 시도함과 아울러 훈소(燻燒)에 의한 지연화재를 위하여 안방 장롱 안 옷에 불을 붙여 놓은 다음 열쇠를 찾아 현관문을 잠그고 도주하는 일련의 범행이 과연 피고인이 아파트를 나간 06:55 경 내지 07:00 경에서 경비가 아파트에서 나오는 연기를 발견한 08:40 내지 50 무렵 사이의 1시간 40분 내지 50분에서, 안방 장롱 안 옷에 붙은 불이 안방 천장 등으로 번지면서 나온 연기가 경비에 의하여 발견될 때까지의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 동안에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딸은 돌이 갓 지난 어린아이로서 부인의 살해와 증거인멸 및 도주에 별다른 장애가 될 수 없을 것으로 보여짐에도 굳이 부인을 살해한 줄과는 다른 줄을 사용하면서까지 목을 졸라 살해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시간 내에 범행이 이루어진 경우 과연 앞서 본 시반, 시강 및 위 내용물에 의하여 사망시간을 추정한 이 사건감정 내용과도 부합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고 판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