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판사들을 앞에 두고 그 분들을 격려하는 듯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이런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영광이면서 한편 주제 넘는 일이다. 김태길(金泰吉) 교수의 ⌜흐르지 않는 세월⌟이란 에세이집에도 이런 말이 있다. ⌜여러 청중을 위해서 윤리 도덕에 관한 설교나 훈화를 하라는 청탁을 받을 때처럼 곤란을 느끼는 경우는 적다. 나에게 사상이 빈곤하고 말재주가 없다는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분수에 넘게 착하고 아름다운 언어가 너무 많이 튀어나올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법관생활을 하는 동안 과오도 적지 않게 범했다고 생각한다. 품위에 어긋나는 행동도 했을 터이고, 알게 모르게 올바르고 정직한 처신을 외면한 일도 많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서 나는 그 분들께 열심히 법관으로서의 바른 길을 외친다. 나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하면 나는 그럴 자격을 갖춘 사람의 대변자로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제넘지만 더 이야기를 소개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나는 경사(徑史) 이회창(李會昌) 변호사의 대학동기로서, 대법원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으로서 그의 화갑기념논문집 간행위원회의 청을 받아들여 ⌜법과 정의(1995)⌟의 권두(卷頭)에 글을 쓰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거기서 원론적인 법관상을 말해본다고 하면서 이렇게 썼다.
강연을 위하여 쓴 어떤 논문에서 필자는 외국의 문헌을 인용하여 완전한 법관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 일이 있다. ‘재판관은 심리나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사려 깊고 경험이 풍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또한 법의 기본원칙이나 선례(先例), 실정법(實定法)의 전체에 대하여 광범한 지식을 가지며 생활경험과 세태인정에 대한 이해를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 이에 더 균형이 잡힌 정신, 천성의 정의감, 준민한 이해력, 탁월한 기억력, 건전한 육체적 조건, 한없는 참을성, 피로를 모르는 근면, 불요의 용기, 두드러진 의무감, 매력 있는 매너, 거기에 유머를 이해하는 센스를 구비하면 거의 완전한 재판관이 된다’는 것이다.
법관이면 한 번쯤 위에 열거한 항목들에다가 자신의 조건을 투영하여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나는 어느 정도 합리적 사고능력(思考能力)을 갖춘 인간인가. 불의(不義)를 배격할 정신무장이 해이되어 있지는 아니한가. 여유 있는 시간을 가치 있게 활용하고 있는가.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생각해 보면 법관만큼 인생에 관하여 생각하는 직업도 있을까 싶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지만 그 인간 가운데서도 법관만큼 온갖 인간사(人間事)를 갖가지 측면에서 이해하고 탐구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주요한 책무로 삼는 직업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가장 완벽한 인간이 하여야 할 직능을 법관이 담당하고 있다고 할 때 법관은 신(神)의 역할을 대신하는 면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어찌 숭고한 직책이 아닐 수 있는가. 지상의 유열과 행복을 느껴야 하는 성스러운 직책이 아니겠는가. 라드브루흐는 ‘참으로 재판관에 적격한 인격은 희귀한 행운의 경우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사회는 법관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사회전체가 사법(司法)의 기능에 대하여 정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이런 각도에서 긍정적으로 답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부정적인 입장에서 그 원인을 찾자면 하나는 사회의 수준 자체가 사법의 기능을 존중하려 하지 아니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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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년 대법관 시절, 마산지방법원 거창지원 재판사무 감사 기념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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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부 때부터 시작된 통치권자의 빈번한 사면권(赦免權) 행사도 그 일익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사면이란 축제 이면에는 사법권의 침해라는 반작용이 수반되고 있는 것을 의식하는 것 같지 않다. 재판의 과정을 겪은 법관의 고뇌를 조금도 배려하는 눈치가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다.
지난날은 그렇다 치고 이른바 문민정부라고 하면서 매스컴은 어찌된 노릇인지 사법부(司法府)에 대한 시각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다루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특정 법관이나 법원의 잘못을 전파로 내보낸 다음 심야에 사과방송을 한 일도 있다. 1993년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때 법관들에 대한 악의에 넘친 한풀이를 경험했다. 그들이 조성한 여론의 화살이 애꿎은 사람의 가슴에 꽂혔고 많은 법관의 자존심을 짓밟았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격적 결함이나 불성실성 등 법관 자신의 처신과 직무상의 과오를 들 수 있다. 일반인의 법관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튼튼하다면 법관의 사소한 잘못은 이해해 주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조그마한 실수도 침소봉대하여 비난하게 된다. 앞에서 사법부를 대하는 사회의 냉엄한 시선에 대하여 사법부의 편에 서서 불만을 이야기하였지만 사법관 자신의 반성과 뼈를 깎는 노력으로 그 화살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그리하여 법관은 보통의 인간수준과 품격 이상으로 처신하여야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법정(法廷)에서는 검은 법복으로 몸을 가려 근엄한 풍모를 보이지만 밖에 나와서도 법복을 벗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자세를 지켜야 한다. 불결하고 독을 가진 벌레가 붙지 않도록 몸가짐을 조심하여야 한다. 친척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조차 ‘판사집’을 자랑으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이다. ‘판사집’은 이런 뜻이 자연스럽게 성취하게 되도록 모범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재판이 아무리 잘 되어도 인격성(人格性)의 비난을 받는 법관의 처리에는 일반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 그것은 법관 개인의 불행이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한다. 하나하나 사법부 전체의 상처로 번지고 그 치유가 늦을수록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고 권위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앞에서 말한 매스컴의 경향도 사법부 자신의 신뢰상실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조그마한 혐의도 용서받지 못할 대죄로 공격당한 것이다. 사회가 법관 개개인의 인격적․도덕적 완성을 믿게 되는 날까지 법관 스스로 피나는 노력을 쏟을 수밖에 없다.
또한 법관은 끊임없이 법률적 기술을 연마하여야 한다. 법률 전문직업인의 솜씨를 발휘하기 위해서 법률적 지식과 교양을 갈고 닦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재판에 한 점 오판(誤判)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축적하여야 한다.
사회구조(社會構造)가 복잡해지면서 날이 갈수록 난해한 사건이 몰려들기 때문에 우수한 두뇌로써도 결론을 얻기 어려운 때가 많다. 법정에서 방황하는 눈치를 보인다든가 변론재개를 되풀이한다든가 당사자나 증인한테 신경질을 부린다던가 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정신적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 유죄판결을 하면 피고인이 찌푸리고 무죄판결을 하면 검사가 섭섭해 하며, 원고승소판결을 내리면 피고가 욕을 하고 피고승소판결을 하면 원고가 발끈한다. 이런 양상이 되풀이되는 것이 재판의 속성이다. 법관은 그래서 고독한 것이다. 그럴 바에야 실력을 쌓는 길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재판 그 자체에 대한 비난 따위야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