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로 상고심에 올라간 사건은 2003. 2. 26. 원심의 무죄판결이 옳다고 하여 검사의 상고가 기각되었다(2001도1314).
「이 사건에서 보면,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직접증거가 없고, 공소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간접증거인 부인과 딸의 사망시각에 관한 여러 증거의 증명력이 환송 두 원심에서 새로 조사된 스위스 법의학자의 증언이나 화재재현실험결과 등에 의하여 크게 줄어들었으며, 그 밖에 사건 직후 피고인의 팔에 남아 있던 손톱자국이나 피고인의 집에서 발견된 딸을 위한 우유병과 1회용 분유통의 상태 또는 식기세척기 등 식탁주변의 상황, 피고인과 부인의 갈등관계 등 나머지 간접증거를 모두 종합하여 보더라도, 공소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명력이 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여기에 피고인에 대한 거짓말탐지기 검사결과 등 피고인의 진술에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더하여 보아도 이 사건에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없이 공소사실을 유죄로 판단할 수 없다.」
이로써 사건 발생 7년 8개월 만에 끝난 한국판 O. J. 심슨 사건의 재판은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남겨놓은 채 사건을 원점으로 돌렸다. 다섯 번에 걸친 재판은 어느 것이나 진범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하여 처절한 노력과 고뇌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재판의 결론이 어떠하든 간에 법관의 사명이 이렇게 무거운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하는 감동적인 판결들이라 할 수 있으며, 모든 관여 재판부의 노고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싶다.
사건의 내용과는 별개이지만 이 사건과 관련하여 세 개의 곁가지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환송 전의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이 선고되고 검사의 상고로 그 판결이 파기되었지만 영미(英美)에서라면 이런 일은 없다는 것이다. 영미에서는 제1심이 무죄판결을 내렸을 때 이에 대하여 검찰이 항소를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 그 무죄판결이 가사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국가기관이 저지른 과오에 대하여 피고인의 부담으로 정정의 방법을 시행한다는 곳은 공평의 이념에 어긋난다는 것, 둘째 제1심이 신중하게 직접 다수 증인의 진술을 닫고 해서 무죄를 선고했는데, 항소심이 그 사건을 재차 심리하여 유죄로 판단할 수가 있다 하여도 과연 그 결론이 정당한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는 것, 셋째 피고인을 제1심, 제2심 두 번에 걸쳐 공포와 위험에 빠지도록 해서까지 국가가 유죄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고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검사에 의한 항소는 소송의 지연을 초래케 한다는 그런 사상이 작용된 때문이다.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으므로 영미에서라면 사건이 상고심에 올라갈 수 없는 것이고, 대법원에서 무죄가 잘못되었다고 하여 파기되는 일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제도가 좋은지는 모르겠으나 하나 분명한 것은 영미에서는 법관 개개인에 대한 지극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절차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환송 후의 항소심판결은 상급심판결에 도전(挑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깨고 돌려보냈는데 다시 무죄라니, 일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법원조직법 제8조는 「상급법원의 재판에 있어서의 판단은 당해 사건에 관하여 하급심을 기속한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파기판결의 구속력(拘束力)을 인정한 것은 심급제도의 본질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만일 파기판결의 구속력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하급심이 자기 판단을 고집하여 상급심의 판단에 따르지 않을 수가 있고, 그러할 때에는 사건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 끝없이 왕복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어 소송제도 자체의 존재이유가 부정된다는 정책적이니 이유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속력은 법률판단 뿐만 아니라 사실상의 판단에도 미친다. 따라서 상고심의 판단이 어떤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있는 때에는 항소심은 거기에 복종하여야 한다.
이 사건의 경우 상고심은 원심판결을 파기하기는 했으나, 「원심으로서는 훈소현상 등 앞에 설시한 여러 가지 상황에 관하여 감정 등을 통하여 제3자의 범행가능성을 좀 더 심리함과 아울러 부인이 사망당시 콘택트렌즈를 착용하고 있게 된 연유에 관하여도 심리를 더한 끝에 피고인의 유죄에 관한 여러 증거들의 종합적 증명력을 따져보아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인의 유죄에 관한 여러 증거들의 개별적인 증거가치와 예외적인 현상만으로 그 증명력을 모두 배척한 끝에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고 있으므로, 이는 결국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한 채 증거판단을 하여 채증법칙을 위반함으로서 판결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 위법을 저지른 것」이라고 이유를 달고 있으므로, 환송 후의 항소심판결은 위에서 말한 파기판결의 구속력에 저촉되는 판결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법률상의 견해이지 실질적으로는 상급심판결의 위력적인 망을 뚫고 독립을 선언한 용단에 다름없다.
마지막 하나는 중형(重刑)의 혐의가 있는 피고인의 신병문제와 관련된 문제이다. 종전의 형사소송법 제331조는 무죄나 형의 집행유예판결이 선고된 때에는 구속영장은 효력을 잃는다고 규정하면서, 그 단서에서 검사로부터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한다는 의견진술이 있는 사건은 예외로 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 사건에서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으므로 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하더라도 피고인은 당장 석방될 수 없었다. 법원의 오판으로 무죄판결이 선고되고 중범자가 석방되어 도주하게 되면 상소심에서 파기되어 유죄확정이 되었을 때 그 오판을 시정, 집행할 수 없는 경우가 되어 국가의 형벌권행사가 불가능해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취지였다. 그런데 위 단서조항은 1992. 12. 24 (92헌가8) 헌법재판소에서 적법절차와 과잉입법금지의 원칙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위헌(違憲)으로 판정이 나고, 1995년의 개정으로 삭제되었다. 사형이 구형된 피고인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