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가 어떤 사람의 범죄사실에 대하여 법원에 공소(公訴)를 제기하면 이때부터 명칭이 피의자로부터 피고인으로 바뀐다. 중범자인 피고인은 공판정에서 무죄를 주장하거나 아니면 양형(量刑)에 관하여 관심을 쏟는다. 공소기각(형사소송법 제327조)이나 면소의 판결(제326조)을 바라는 경우도 있지만 매우 드물고, 형의 양정에 대하여서도 법관의 재량이 크므로 마음속으로 구형보다 훨씬 적은 형을 선고해 주기를 바라는 정도이다.
문제는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인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놀랄 일은 아니다. 판사 앞에서 공소사실 모두를 순순히 시인하고 구형대로 처벌받겠노라고 자신을 방기하는 피고인은 별로 없다. 물증이 뚜렷하지 않은 범죄인 때에는 일단 부인(否認)하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부인의 양상은 강도가 떨어질 것이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범행의 고의성, 악질성에서라도 탈피하여 중형을 피하면서 재판부의 동정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이것이 모두 무죄를 위한 투쟁에 다름없다.
그 가운데에는 실질적이고 전면적으로 무죄를 주장하는 사건이 있다. 절대 그런 범행을 한 일이 없다고 수사단계에서부터 강도 높게 부인하고 온 사건의 경우 대부분은 확실한 증거가 없다.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직접증거가 없고 정황적 사실을 증명하는 간접증거가 있을 뿐이다.
범행의 심증(心證)은 가는데 명백한 증거가 없는 경우 수사기관은 자백(自白)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무리수를 쓰게 된다. 2002년 11월 검찰의 밤샘조사를 받던 살인피의자가 숨지면서 가혹수사파문이 일어나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함께 사퇴하고 담당검사가 구속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진 일이 있다. 그것도 자백을 얻어내기 위하여 고문을 한 까닭이었다.
자백은 범죄를 입증하는데 있어 가장 편리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신빙성이 추정되므로 「증거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 자백을 얻기 위한 권력의 남용이 끊임없이 이루어져 온 것이다. 자백의 증거능력과 증명력을 제한한 헌법 제12조 제7항, 형사소송법 제309조, 제310조 등의 규정이 있고, 임의성(任意性)에 의심 있는 자백의 증거능력을 부인하는 많은 판례가 있다 하더라도, 일단 자백이 끝난 뒤에는 자백의 임의성이 추정되고 마는 것이며(대법원 1983. 3. 8. 선고 82도3248 판결, 2001. 9. 28. 선고 2001도4091 판결), 그 뒤에는 피고인 측이 자백의 임의성의 존부에 관하여 법관이 의심을 일으키도록 구체적 사실 즉 고문, 폭행, 협박,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기망, 기타의 방법 등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대법원 1984. 8. 14. 선고 84도1139 판결).
물론 자백이 있고 그것이 임의로 진술한 것이기 때문에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있다 하여도 당장 자백의 진실성과 신빙성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법원은 「그 진술의 내용이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되는지의 여부나, 자백 이외의 정황증거들 중에 자백과 저축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없는지의 여부 등을 두루 참작하여 자유심증으로 자백이 신빙할 수 없는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하여야 하도록(대법원 1993. 1. 12. 선고 92도2656 판결) 되어 있는 것이다.
직접 증거가 없는 사건에서 검사 등 수사기관이나 공판정에서의 부분적인 자백진술이 있고, 그러면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진술의 일관성이 없는데다가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하는 취지로 다투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때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판별하는 법관의 심증형성은 매우 어렵다.
헌법 제27조 제4항, 형사소송법 제275조의2는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라고 하여 이른바 무죄추정(無罪推定)의 원칙을 규정했다. 이는 「언제나 불리한 처지에 놓여 인권이 유린되기 쉬운 피의자, 피고인의 지위를 옹호하여 형사절차에서 그들의 불이익을 필요한 최소한에 그치게 하자는 것으로서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궁극의 목표로 하고 있는 헌법이념에서 나온 것」(헌법재판소 1992. 1. 28. 선고 91헌마111 결정)이고, 형사사건의 유‧무죄가 문제될 때에도 법관은 이러한 원칙적인 자세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신현주(申鉉柱) 교수는 그의 저서(형사소송법 1999년판 박영사)에서 증거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의 핵심은 무고한 자를 잘못 처벌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죄 있는 자가 방면되는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 구체적 한계에 관하여서는 문제가 제기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썼다.
「예컨대 한 사람의 무고한 자와 한 사람의 죄인의 대비가 한 사람 대 두 사람 또는 한 사람 대 열 사람의 확대대비과정을 거쳐 한 사람의 무고한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백 명, 천 명의 죄인을 처벌할 수 없게 된다면 그 사법절차는 존립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그렇다면 그 한계는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결국 ‘열 사람의 죄인을 석방하더라도 무고한 한 사람을 처벌하여서는 안 된다’는 법언은 유‧무죄 판단의 신중성을 강조하는 법언으로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에 불과함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여 만약 10:1의 비율로 죄인이 빠져나간다면, 무고한 자가 처벌될 위험에 대한 다른 보장의 고안과 함께 유죄인 자가 석방될 수 없도록 조치를 강구하지 않는 것은 형사사법제도의 운영상 중대한 파탄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죄추정의 원칙은 공소사실에 대한 증명(證明)의 단계에서 ‘의심스러운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으로 적용된다. 다음에 하는 이야기는 이와 관련된다.
운전기사를 시켜 남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징역 10년의 선고를 받은 피고인의 상고사건을 수임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54세의 그 가정주부는 4백여 일 만에 무죄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오직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운전기사의 진술 하나가 유일한 증거였고, 그 진술이 거짓이라는데 대한 여러 가지 반증을 제시했으나, 제1심, 제2심 모두 이를 외면하고 운전기사의 말만 믿어 피고인을 살인교사범(殺人敎唆犯)으로 단정했던 것이다.
공소사실은 「피고인은 남편인 피해자가 주벽이 심하여 술을 마시면 피고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의처증이 심하여 당시 진행 중인 목욕탕건물 신축공사장의 포크레인 운전사와의 불륜관계를 의심하는 등으로 가정불화가 심화되자, 남편과 이혼을 결심하고 1994. 12.경 법원에 이혼심판청구소송을 준비하던 중, 그 무렵 운전기사(피고인 갑)가 남편의 운전사로 채용되자 남편을 수행하여 다니는 갑에게 남편의 방문 장소, 만나는 여자 등 제반 상황에 대하여 수시로 피고인 자신에게 상세히 알려달라고 부탁을 하여, 갑으로부터 ‘사장님이 사모님 및 그 처가 식구들을 살해하겠다’고 한다는 말을 수차 전해 듣고 남편에 대하여 증오심을 가지고 있던 중, 남편이 1995. 1. 초순 일자 불상경 피고인 및 자식들과의 불화를 비관하여 갑이 운전하는 승용차로 수일 간 여행을 다녀오기로 하여 갑이 남편을 태워 울산 방면으로 가던 중, 그 날 14:00 경 부산 금정구 산록장여관 201호에 투숙한 후 1박한 다음 이튿날 20:00 경 위 여관에서 갑과 피고인이 전화통화를 하면서 갑이 울면서 피고인에게 피고인부부의 불화문제로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져서 더 이상 기사 일을 못하겠다는 말을 내비치자, 피고인은 갑에게 ‘뭐 그렇게 중간에서 고심하나, 그 새끼 죽여 버리면 되지, 그 새끼를 죽여 버리면 내가 생활비도 줄게’라고 말하고, 그 이튿날 오후 피고인과 갑이 다시 통화를 하면서 갑으로부터 ‘사장님이 가족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고 이야기를 한다는 말을 듣고 남편에 대한 증오심이 복받쳐 올라 갑에게 부탁하여 남편을 살해하겠다고 결의한 후, 갑에게 ‘그 인간 네가 죽여버리면 내가 한 달에 생활비 5백 내지 6백만 원씩을 주겠다’고 말을 하자, 갑은 그 동안 피고인 부부의 불화과정에서 수차에 걸쳐 남편을 죽여 버리라는 피고인의 말이 단순히 일상적인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나머지 남편을 살해하겠다고 마음먹음으로써 갑으로 하여금 남편을 살해하도록 결의하게 한 후, 같은 날 초저녁 위 여관 201호실에서 갑이 쇠파이프로 남편의 머리 부분 등을 수회 강타하여 좌측두개골복잡함몰골절 등의 상해를 입게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시경 사망에 이르게 하여 남편을 살해하여 갑의 살인행위를 교사」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