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심에서 시정되었으니 천만다행이지 제1심이나 항소심판결대로 피고인에게 유죄가 확정되었더라면 어찌 될 뻔했던가. 제1심이나 항소심판결은 마치 운전사의 진술이라는 직접증거가 있으니 어디 피고인이 무죄임을 증명해보라는 듯한, 다시 말하자면 의심스러운 점은 있지만 무죄라고 확신할 만한 자료가 없다는 투의 판결이유를 내밀었다.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형사소송법상의 원칙을 무시한 재판이었다.
상고이유서(上告理由書)는 나와 서정우(徐廷友) 변호사 공동명의로 제출했는데, 뒤에 서 변호사가 보충상고이유서를 썼다. 그 마지막 부분의 각주에서 「이 부분은 몇 번 썼다 지웠다하다가 그대로 쓰기로 하였습니다. 법관 출신인 제가 변론에 스스로 취하여 법관들을 근거 없이 비난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불쾌하시더라도 참으시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예의를 차렸는데, 오히려 더 당당하게 써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 여기 일부분을 소개해본다.
「이 사건 기록을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갑의 모순덩어리 진술 외에는 피고인에게 살인교사의 죄책을 씌울 증거가 없습니다. 오로지 성급하게 피고인을 범인으로 지목한 경찰과 이를 지휘한 검사의 초조함과 피고인을 처음부터 독부(毒婦)로 단정한 법관의 화려한 추리력의 자랑이 보일 뿐입니다. 물론 피고인은 무죄의 입증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록을 하나하나 검토하여 보면, 적어도 피고인이 유죄라고 볼 합리적 의심조차 없을 정도는 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같은 기록을 보고 유죄의 확신을 줄 증거가 있음은 물론 무죄의 합리적 의심조차 없다고 판단하는 법관들의 강심장에 가슴이 서늘할 뿐입니다. 사법의 정의를 추구하는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 사건을 담당하는 법관의 고뇌를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직업법관으로서 혹시 범인에게 속아서 유죄의 중죄인을 놓아주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하비다. ‘유죄의 갑 제1호증은 바로 공소장’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오고 갈 때 저는 법관의 편에서 이해하려 노력한다고 자처합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대법관님, 우리가 추구하는 사법의 정의는 법관으로 하여금 콜롬보 같은 추리력을 가지고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찰과 검찰에 콜롬보가 많은데도 사법부가 따로 독립하여 있는 것은 혹시나 화려한 추리만으로 억울한 사람이 유죄의 판단을 받게 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입니다. 중한 형사 사건을 다룰 때 법관이 진정으로 하여야 할 고뇌는 범인을 밝혀 내지 못할 두려움에서 오는 고뇌가 아니라 혹시라도 무죄인데 잘못 판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오는 고뇌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건에서 이러한 고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간교한 피고인에게 속지 않고 범인을 추상같이 엄벌하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는 법관의 자만심 어린 추리력의 피력을 볼 뿐입니다. 그리고 죄송스러우나 저는 그 추리력이 지극히 잘못 행사되었다고 감히 단언합니다.」
피고인을 구하겠다는 열정이 철철 넘쳐나면서 오판의 확신에서 갖는 공포를 호소하는 메시지가 담긴 상고이유였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일본에서는 요시다(吉田) 암굴왕(岩窟王) 사건이라는 재판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 보도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83세의 요시다 노인은 일본의 에드몽당테스로 비추어졌다. 1913. 8. 13. 밤 피고인 요시다와 갑, 을, 셋이 공모하여 길에서 사람을 죽이고 돈을 강탈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제1심에서 요시다는 사형, 갑과 을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갑과 을은 바로 상소를 포기했고, 요시다는 항소를 했으나 모기징역으로 감형이 되었을 뿐이었고, 대심원에서도 1914. 11. 3. 상고기각으로 항소심판결이 확정되었다. 요시다는 형의 집행으로 20여 년간 복역하다가 1935. 3. 21.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요시다는 교도소에서부터 출소한 후에 이르도록 여러 차례 재심(再審)을 청구했는데, 1961. 4. 11. 드디어 재심개시결정을 받아 1963. 2. 28. 나고야(名古屋)의 고등재판소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갑과 을의 공동범행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건 발생 당초부터 갑과 을의 범행으로 자백진술이 있었고, 그 진술의 경위라던가 관계증거에 비추어 충분히 신뢰할 만 했는데, 이상한 과정을 거쳐 평소 거짓말을 잘하는 을이 경찰의 유도신문에 얼떨결에 요시다를 끌고 들어갔던 것이었고, 급기야 그들의 죄책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자기들이 한 일을 경쟁적으로 요시다에게 전가하는 변해를 하기에 이르렀다.
불운하게도 요시다의 집에서 혈흔과 같은 것이 묻은 옷가지와 흉기 비슷한 물건이 발견되었는가 하면, 알리바이에 대한 주장조차 허사로 돌아가 수사관의 예단을 강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일본의 재판사상 미증유의 오판(誤判)이 되풀이되어 요시다 피고인으로 하여금 20여 년의 긴 세월을 감옥에서 신음하도록 했던 것이다.
재심판결은 검사의 상고포기로 확정되었는데, 그 판결은 마지막 부분에서 위와 같은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다고 하면서, 덧붙이는 말로 피고인에 대하여 과오를 사죄하는 다음과 같은 이례적이니 표현을 하고 있다.
「우리 법원은 피고인, 아니 여기서는 피고인이라고 하기보다 요시다 옹(翁)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우리의 선배들이 옹에 대하여 저지른 과오를 진사(陳謝)함과 아울러 실로 반세기의 긴 세월에 걸쳐 온갖 박해를 참으면서 자기의 무실(無實)을 주장하여 온 그 숭고한 태도, 그 불요불굴의 경탄하기 비할 데 없는 정신력, 생명력에 대하여 심심한 경의(敬意)를 표하며, 옹의 여생에 행복이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우리 사건과 비슷한 것은 공범자(共犯者)의 진술 때문에 아무 관계도 없는 피고인이 살인의 중죄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공범자의 자백은 피고인의 자백이 아니며, 그 진술에 대하여는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이 보장되어 있어 독립한 증거능력이 있다는 것이 판례(대법원 1992. 7. 28. 선고 92도917 판결)이다.
형사소송법 제310조는 「피고인의 자백이 그 피고인에게 불이익한 유일의 증거인 때에는 의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는데, 공범자의 진술은 피고인의 자백에 포함되지 아니하므로 피고인의 범죄사실을 인정함에 있어서 공범인 다른 피고인의 진술을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도 앞의 우리 사건에서처럼 공범자의 자백을 안이하게 신용하여 무서운 결과를 빚어내고 만 것이었다.
